회삿돈으로 여행하기
우리 회사는 3천여 명의 직원 중 약 90퍼센트 이상이 원격으로 일하는 리모트 회사다. 팀원들은 대부분 유럽, 미주 지역에 베이스를 두고 있지만, 나처럼 아시아 시간대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업무상 모든 대화는 슬랙과 줌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나는 프로젝트를 함께 하는 회사 동료 대부분(stakeholders라고 흔히 뭉뚱그려 부른다)을 실제로 만난 적이 없다.
그런 우리가 일 년에 딱 한 번, 3D의 모습으로 대면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바로 ‘리트릿(Retreat)’. 직역하면 ‘후퇴, 물러서다’의 뜻을 가지고 있지만, 영미권에서는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다시 에너지를 충전하는 휴식의 시간을 일컫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이제야 수면 위로 올라오는 듯 하지만, 사실 리트릿은 외국에서는 회사나 커뮤니티, 짐, 요가원 등 크고 작은 조직에서 정기적으로 열 정도로 잘 자리 잡힌 이벤트 프로그램의 한 갈래다. 프로그램의 내용은 조직이나 이벤트의 특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대개는 함께 비일상적인 공간(= 휴양지)에서 3박 4일, 5박 6일씩 머물며 몸과 마음의 긴장을 이완시키고 해당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체험과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경험에 집중한다.
우리 회사에서는 크게
EMEA(Europe, Middle East, Africa; 유럽, 중동, 아프리카)
America (북미, 중미, 남미)
APAC (Asia Pacific region; 아시아 태평양 지역)
세 지역으로 나누어 각 대륙에 베이스를 둔 직원들을 한 곳으로 초대한다. 전 직원은 일 년에 한 번 각 대륙에서 열리는 리트릿에 참여해 함께 일을 하거나 휴양을 즐기며 일주일을 보낸다.
나의 경우 작년에는 베트남 남부 섬 푸꾸옥(Phu Quoc), 올해는 이탈리아 옆 작은 섬나라 몰타(Malta)에서 열린 리트릿에 참여했다. 해당 리트릿이 열리는 대륙권에 있는 직원들을 대상으로 회사에서 항공편과 숙식, 투어 프로그램 비용 전체를 지원해 준다.
세부 일정은 그때그때 다르긴 하지만 대개 오전에는 시니어 팀원의 강연을 듣거나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워크숍 등을 진행하고, 오후에는 원하는 투어를 신청해 팀원들과 함께 재밌는 체험(페리 투어, 섬 투어, 워터파크, 와이너리 투어 등)을 한다. 다이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서양권(?) 답게 디너파티는 네온 코스튬, 하와이안 등 드레스 코드 컨셉이 있을 때도 있고, 파인 다이닝과 여러 공연, 디제잉 부스까지 동원되기도 한다.
세계 각국의 서로 다른 리트릿이나 워케이션, 페스티벌을 참여해 본 내 입장에서 회사 리트릿의 특별했던 점을 꼽아보자면 다음과 같다.
약 백여 명의 직원들이 한 여행지에서 일하고 놀고먹고 마시는 프로그램인 만큼, 스케일이 장난 없다(일반적인 단체에서 여는 리트릿 프로그램은 그보다 규모가 작은 수십여 명 정도가 보통 맥스). 성당이나 갤러리, 성을 통째로 빌려 아리아 공연이나 군악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하고, 프라이빗한 열대 섬에 들어가 야외 테이블에서 뷔페를 먹으며 불쇼를 관람하기도 한다(물론 직접 참여도 가능). 5일 동안 지내는 5성급 호텔의 퀄리티나 공짜 왕복 비행기 티켓이야 말할 것도 없다.
회사에서 여는 리트릿인 만큼, 함께 일을 하거나 워크숍을 하는 시간이 반드시 있다. 다만 이때는 평소 혼자 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대신, 팀 전체의 아젠다를 가지고 다 같이 토의하거나 질의응답해 볼 수 있는 세션을 주로 진행한다. 아이스 브레이킹이나 잘 몰랐던 다른 팀, 다른 부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 pop 퀴즈 시간들도 있다.
줌 콜이나 슬랙 메시지를 통해서만 만났던 팀원들을 직접 마주하게 되는 순간은 회사 리트릿의 하이라이트일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2D에서의 화면이나 목소리랑 비교했을 때 인상이 확 달라지기도 하고(생각보다 키가 작다거나 덩치가 크다거나 패션이 특이하다거나), 업무 외적인 대화를 했을 때 더 유머러스하거나 말도 안 되는 너드 혹은 파티광인 사람들도 있다.
팀원들과 다 같이 사우나를 가거나 수영을 하고 밤새 술판, 출판을 벌이는 경험은 사실 그 어떤 조직에서도 하기 힘든 특이한 경험이다. 만나기 어려운 만큼 회사 사람들이 업무 외 캐주얼한 시간들을 함께 보내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최선을 다해 즐긴다. 이렇게 리트릿을 통해 친해진 이후로 다시 슬랙 워크스페이스로 돌아오면, 같은 프로젝트를 참여할 때 더 동기가 불타오른다거나 적극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등 사이가 더 끈끈해지기도 한다.
원격근무는 나에게 백수 못지않은 시공간의 자유를 주지만, 동시에 일상에서 유대감이나 소속감을 피부로 느낄 일이 줄어드는 것도 사실이다. 보이지 않는 오피스에서 보이지 않는 동료들과 보이지 않는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하루하루에서 무료함을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드라마틱한 리트릿에서의 경험은 보이지 않는 이들과 만드는 일터를 상상하게 한다. 이 비일상적인 공간에서 보낸 짧은 5일은 남은 360일을 또 열심히 달리게끔 하는 동력이 된다. 내년에는 또 언제, 어디에서 지구상에 흩어져있는 나의 팀원들을 만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