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핑크 카펫 앞의 찌질이

이런 엄마라서 미안해

by 쑤니

회사 사무실은 양재역에 있다.


퇴근길.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기 위해 3호선을 기다린다.

스크린도어에 붙어있는, 임산부 배려석의 위치를 알려주는 핑크색 원형 스티커를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오늘은 자리가 비어있을까"


럭키다. 임산부 배려석이 비어 있다. 재빨리 앉아서 임산부 뱃지를 가방 위에 잘 보이게 펼쳐둔다. 혹시라도 팔에 뱃지가 가려지기라도 할까 신경 써서 자세를 잡는다.


아쉽게도 3호선의 행운은 6분밖에 누릴 수가 없다.

9호선 환승역에서 스크린도어의 핑크색 원형 스티커를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이거 타고 집까지 가면 좋겠다"


9호선은 운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다. 다음 환승역까지 10분만 버티면 되니까 그 정도야 버틸 수 있다.


문제는 1호선이다.

집 근처 역에 도착하기까지 30분은 타고 가야 한다.

열차가 도착하고 문이 열린다... 두근두근... 젠장, 웬 건장한 남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난감하다. 일부러 임산부 배려석 위치가 표시된 문으로 탔으면서도 당당하게 그 앞에 설 용기가 나지를 않는다.

한편으로는 그 남자 앞에 서서 뱃지가 잘 보이게 흔들어주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게 노골적인 의도를 표시한다는 것이 어쩐지 두렵고 꺼려진다.


찰나의 고민 끝에, 결국 애매하게 핑크 의자를 등뒤에 두고 돌아서 있거나 두 칸 정도 벗어난 위치에 서게 된다.

아예 시선에서 벗어나서 그가 마음 편히 앉아가게 하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 앞에 서서 눈을 마주 볼 용기는 없는.

엄마는 강하다는데 난 아직 덜 엄마인가. 왜 이렇게 용기가 없나.

포기하고 마음 편히 서있지 왜 어정쩡한 자세로 그를 의식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지. 찌질하다.


1호선 열차가 신도림역을 지나면서 사람들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쳤다.

퇴근길 직장인들의 파도 속에 그와 내가 단절되고 그가 날 절대 볼 수 없도록 시선이 차단된 이후에야 오히려 포기하면서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남편에게 하면 "당당하게 앞에 서서 양보를 받아. 네 권리를 찾아"라고 쉽게 말한다.

과연 그가 막상 나와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나만 이렇게 찌질하고 미련한가.


출근길. 아마도 스크린도어에 붙어있는, 임산부 배려석의 위치를 알려주는 핑크색 원형 스티커를 바라보면서 생각할 것이다.

"오늘은 자리가 비어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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