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alin Jul 12. 2023

프랑스 어학원에서 밥 친구 구하기

 새 학기마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 건 고된 일이다. 누구나 학창 시절 속 학년이 바뀔 때마다 친한 친구와 부디 같은 반이 되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한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성격마다 다르겠지만, 이제 와서 보니 아는 친구가 아무도 없는 반에 놓인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질 정도의 큰 시련은 아니다. 그 나이 때는 절친과 다른 반이 되는 게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겠지만,

그 짧은 쉬는 시간에 친한 친구를 만나 키득대면 각자 다른 반에 돌아가는 발걸음이 좀 나아졌다.

어쨌든 그들은 여전히 같은 공동체로 묶여 있다. 같은 학년, 같은 동네에 사니 한 다리만 건너도 친구가 겹쳤다. 새로운 얼굴이어도 조금만 생각하면 말 붙이기 위해 물고 틀 주제는 너무나도 많다. 사탕을 쓱 하나 짝꿍의 손에 쥐어 준다거나, 하다못해 그 당시 유행하는 음악이나 드라마 제목만 툭 던져도 쉬는 시간 끝나는 종이 칠 때까지 떠들 수 있다.


 당시 프랑스에 도착한 지 며칠 후, 처음으로 어학원에 반 배치 고사를 보러 가야 했던 날이다.

그토록 바랐던 외국의 자유로운 거리인데, 혹여라도 길을 잃을까 철저히 스마트폰 안에 지도만을 의지하며 걸었다. 지도를 켜며 종종 들었던 생각은 스마트폰이 없었을 때 먼저 유학길을 걸으신 선배님들이 존경스러웠다. 나는 목적지에 도착한 후에야 지도에서 눈을 떼 건물을 올려다볼 수 있었다. 


 고풍스러운 본관을 따라 걸으면 나오는 큰 홀에는 여러 인종이 모여 있었고, 종이에는 학번과 다양한 국적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처음 보는 가지각색의 사람들, 내가 모를 유행의 패션들. 그렇지만 다들 짜기라도 한 듯 눈치껏 같은 인종끼리 모여 앉았다. 아, 이렇게 다른 우리가 같은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 어린 시절 친구를 사귀었던 방법이 까마득했다. 그래도 조금 컸다고 세상이 무너질 만한 정도의 고난은 아니었다. 

색이 다른 눈동자들이 둥둥 떠다니며 처음 보는 얼굴에 호기심이 가득하다. 마이크를 든 교수님의 안내로 시험은 시작됐고, 우리의 눈은 시험지에 처박혔다. 뻣뻣한 자세로 앉아 어떻게 풀었는지도 모를 레벨 테스트를 기준으로 어학원 반 편성이 끝났다.


 며칠 후, 반 편성을 보고 속으로 소리 없는 기쁨의 소리를 질렀다. 함께 온 동기와 같은 반이 된 것이다.

하지만 며칠 후 그녀는 더 레벨이 높은 반으로 반을 바꿨고, 초조해진 내 눈에 걸린 딱 한 명의 한국인 이름이 나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해서 우리 반의 한국인은 나, 그리고 학교에 잘 나오지 않는 동생 딱 두 명이다.


 내가 다녔던 어학원은 그 지역 다른 학교들에 비해 가장 학비가 비싼 가톨릭 학교였다.

부자 자녀들이 다녀 잡음이 없는 동네, 치안이 좋아 유학생이 붐비는 곳. 동생에게 그 비싼 학비를 내고 왜 학교에 나오지 않냐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어머니 회사에서 유학비를 무료로 대 준다는 얘기에 조용히 입을 다물게 되었다. 꾸역꾸역 학자금 대출을 받아 온 나와는 전혀 다른 처지임을 알았다.

또, 언니가 돼서 동생에게 한국인이 너 말고 없어서 외로우니 수업 좀 나오라고 하기엔 자존심이 상했으니까.


 우리 반은 미국, 베트남, 일본, 중국, 한국인으로 편성되었다. 미국인 클로에는 발표를 안 하는 날이 없을 정도로 적극적이었고, 제레미는 록을 좋아하는 남자애였다. 이상하게 제레미와 역할극 시간에 나와 자주 파트너가 되어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음악'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얘기하니 과제 중 남는 시간에는 가끔 사담으로 때우기도 했다. 어학원 5분 거리에 초록색 배경의 원숭이 간판이 그려진 몽키 바에서는 종종 음악 공연을 한다. 끽해야 재즈나 팝 종류의 음악 공연이겠지 생각했으나 장발의 남성 보컬과 찢어진 옷을 걸쳐 입은 밴드 멤버들이 우르르 몰려와 록을 내 귓가에 때려버렸다. 그 몽키 바를 남자애에게 추천해 줬더니 눈이 반짝였다. 수업 시간에 자신이 좋아하는 록 음악을 소개하며 뽐내던 자유롭고 멋들어진 제스처가 지금까지 눈에 선하다.


 중국인 알로하는 나와 같은 기숙사에 살았고, 불어가 아주 서툴지만 사랑과 꿈을 가지고 중국인 남자친구의 손을 잡고 함께 프랑스로 왔다. 우리 기숙사에는 외부인이 출입 금지인데, 알로하의 남자친구는 우리를 앞세워 뒤따라 몰래 들어왔다. 그렇다고 안 보였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친절한 사감 선생님이 모른 척해준 게 아닐까 싶다. 귀국을 준비하며 기숙사를 떠나기 전, 알로하는 남자 친구와 같이 파리로 학교를 옮길 것이라고 얘기했는데 SNS를 보니 정말 파리로 정착한 것 같다. 가끔 함께 하교하던 날이면 그 둘 사이에 껴서 사랑싸움을 지켜보곤 했는데, 한 번의 이별이 있었으나 그 뒤로는 아직도 잘 사귀는 중이다.

 

 아무튼 우리 반은 베트남 소굴이라고 해도 맞는 표현이다. 어린 친구들이 뭉쳐 수업 시간에도 모국어를 쓰니 다른 사람들의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어 가끔은 반 밖으로 쫓아내고 싶었다. 그래도 축구 얘기가 나오면 박항서 감독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고 입을 꾹 닫았다. 심지어 k-drama는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정도니 그들의 한국 사랑은 한국인으로서 매우 고맙고 뿌듯했다. 그러던 날, 난생처음 프랑스에서 첫 생일을 맞게 되었다. 하이틴 드라마처럼 대단한 생일날이 아니어서 마음이 싱숭생숭했을 무렵, 중국인 친구가 나를 툭툭 치더니 웬 쪽지 한 장을 건네주었다. 알고 보니 베트남 친구가 삐뚤빼뚤 서툰 한글로 쓴 이 쪽지를 건너 건너 전달해 준 것이다. 쪽지를 펼쳐본 순간 마음이 녹았다. 완벽한 문장도 아닌데, 서툰 한글에서 처음 느껴보는 뭉클함이었다. 



 그렇지만 귀여운 베트남 친구들의 컨닝은 눈감아줄 수 없었다. 쪽지 시험이 끝난 후, 일본 친구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며 의논하여 내린 결론이다. 행동 대장인 나는 다음 날 선생님을 찾아가 밀고했다. 나의 학점과도 직결된 문제이니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반이 다른 동기들과 수업이 어긋나는 날에는 혼자 밥을 먹어야 했다. 한국 대학에서 혼밥은 흔한 일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어학원의 생리는 달랐다. 먼 타국에서 온 외로움을 달래려 같은 나라와 인종끼리 똘똘 뭉쳐서 다녔다. 오히려 어학원 홀에서는 혼자 밥을 먹는 사람이 드물 정도였으니까.

 

 나는 그 많은 무리 중 혼자 밥 먹는 것이 외로웠고, 같이 점심시간을 보낼 한 시간짜리 친구라도 좋으니 절실하게 바랐다. 거절하지 않을 것 같은 일본인 친구와 몇 마디 얘기를 나눈 결과,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다.

어느 무리나 이미 형성된 상태에 끼어드는 사람의 입장은 을이다. 눈치껏 그들의 분위기를 파악해야 한다.

친절한 것과는 별개로 어쩐지 그녀들 사이에 있으니 더 외로웠다. 서툰 불어로 대화하다가 막히면 소통이 안 되니 어쩔 수 없이 그들끼리 얘기할 때는 잠시 주춤해지는 시간이 불편했다.


몇 달 뒤, 마담 홈스테이 집을 떠나 학교 근처로 이사한 뒤 무리에서 벗어나 혼자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내키지 않는 음식을 굳이 먹지 않으며, 공백과 침묵을 채우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이 편했다.

그때 알게 된 건 나만의 시간을 굳이 누군가로 채우려고 하면 체하게 된다. 

내 느린 속도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게 감사해질 지경이었다.


 여기는 한국이다. 회색 빌딩보다 푸른 밭이 눈에 띄는 뭐든지 느리게 굴러가는 시골 동네.

이제는 록 음악이 나오면 이상한 제스처를 취하는 사람도 없고, 수염을 턱 밑까지 기른 사람도 없고, 머리색이 튀는 사람 하나 없는 동네에 왔다. 가끔은 친해지기 위한 불편한 과정의 감정들이 그립다.

사실 불편했던 거지 그다지 싫은 게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논밭의 전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부는 식탁에 앉아 잘 차린 밥을 먹다 문득 울컥했다.


 아, 내가 외롭구나.

 주머니 속 건네줄 이 없는 사탕을 만지작대본다.

작가의 이전글 24살, 시골에서 뭘 하며 살까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