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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lin Apr 27. 2023

갑자기 교수님이 여행을 과제로 내 주셨어요


 

 꿈에 그리던 프랑스 생활도 날마다 특별한 순간은 아니었다. 그 어느 곳처럼 밤에는 눈을 감았고, 눈을 뜨면 또다시 새가 지저귀는 아침이었다. 프랑스 학생들은 2월 말부터 3월 초까지 약 2주 동안 봄방학을 누린다.

 결석이라는 옐로카드를 받지 않아도 합법적으로 가방을 툭 메고 어디든지 떠날 수 있으니 그 나이다운 방학이다. 슬쩍 들은 얘기로는 그들은 매번 같은 장소로 바캉스를 떠난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게 쉼을 주는 애착 장소를 만드는 건 숨 쉴 구멍을 하나 파 놓는 일이다.


 아무튼 방학에, 파업에 뭐 그리 쉬는 날이 많은지 그들은 시간에 쫓기지도 시간이 쫓아가지도 않으며 그저 시간과 나란히 흘러간다. 교환학생으로 왔으니 하고 싶은 일은 산더미인데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봄 방학에는 타국으로 여행 갈 생각은 꿈도 못 꿨다. 스키를 타러 간다는 동기들의 여행 계획에서 빠진 나는 앙제에 덩그러니 남았다. 대여섯 시간 기차를 타고 가도 만날 사람 하나 없는 공간은 이색적이고 막막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어'라는 말은 더 이상 막연한 말이 아니었고, 이 세상에는 나를 아무도 모를 수 있는 장소가 실제로 존재했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이 왜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그토록 가고 싶어 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1. 오로지 나만의 여행이 된다

 여행에 모든 제약이 없다곤 할 수 없다. 날씨, 파업처럼 그날의 컨디션으로 내가 계획했던 일정이 무산될 수도 있다. 하지만 떠나는 시간, 돌아오는 시간, 그리고 한 공간에 머무는 시간까지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나만의 여행이 된다. 심지어 교통편까지도 몇 시에 무엇을 타고 이동할지는 누구와 상의하지 않고 혼자 계획하며 결정한다. 아무리 여행 파트너와 모든 게 잘 맞아도 한 공간에 얼마만큼 머무르고 싶어 하는 욕심은 다 다를 수밖에 없다. 사람의 취향은 생각보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갈라진다.

 

 이를테면 색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모양이 마음에 들어서와 같이 꼬투리만큼의 차이로 달라진다. 

 패키지여행을 다녀온 각 사람의 후기를 보면 제각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 한 공간에 머무르고 싶은 시, 분, 심지어 초까지도 다른 건 당연하다. 사람의 마음은 주인도 모르게 매초 변덕스럽게 바뀐다. 사람마다 취향도 다르지만 부는 바람에 느끼는 체온도 다르다. 내 마음에 드는 풍경 앞에서 감탄을 자아내고 있는 순간, 상대방은 춥고 지겹다며 빨리 숙소로 돌아가고 싶어 하면 얼마나 아쉬울까.

 상대방이 말을 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게 된다면 모르는 체할 수 없어 놓치고 싶지 않은 풍경 앞의 그 자리를 생각보다 빨리 떠날 수밖에 없다.


 2. 나다움은 사라진다

 처음 보는 사람은 과거의 데이터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진다. 심지어 어제 어떤 옷을 입었는지 알 수조차 없다. 내가 식별할 수 있는 건 앞에 놓인 이 낯선 사람의 얼굴, 머리, 옷, 그리고 말투와 몸짓이다.

 그러니 척하지 않아도 된다. '평소 나처럼' 을 잠시 잃어도 된다. 심지어 어제와 180도 다른 모습일지라도 처음 만난 사람들은 그 시간의 내 모습으로 나를 판단한다. 오늘 다른 사람이 되고 싶으면 다르게 행동하면 된다. 그들은 어제의 나를 보지 않았다면, 오늘의 내가 나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여행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은 무작정 해외로 떠나라는 말이 아니다. 바쁜 현대 사회에서 매번 비행기 티켓을 끊고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작년에 들었던 여행 인문학 수업에서 먼 해외가 아닌 집 앞으로도 여행을 떠날 수 있다고 말했던 내용을 얘기하고 싶다.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소중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살면서 지나쳐 온 골목이나 학교 캠퍼스 등, 낯선 곳에서 어린 왕자처럼 불시착을 통해 길을 잃어 보세요. ” 라는 과제의 문구를 보고 한참 생각했다.

 

 그중에서도 길을 잃어 보라는 말씀이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았다. 나는 소위 말하는 길치며, 교환 학생 기간에도 ‘혹시 길을 잃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불안감에 혼자 여행을 마음 편히 하진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개인적으로 과감히 길을 잃어 보라는 얘기가 반가웠다. 여행이라는 건 그동안 지나쳐 왔던 곳들도, 꼭 새로운 곳이 아니어도 된다. 익숙한 공간이어도 나에게 새롭고 낯선 생각과 마음만 있다면 새로운 것들이 보이는 여행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새로운 것들을 보려고 노력하는 자체가 익숙한 마음은 아니기 때문에 조금은 노력해야 했다. 매번 낮에 지나쳤던 학교 앞 운동장을 밤에 걸으며 시간 여행을 즐긴 후에는 꼭 새로운 마음과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프랑스에서 계획대로 되지 않는 여행 덕분에 주변 어른들은 한국에 돌아온 나에게 "네 나이 때,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건 정말 대단한 거야"라고 말했다. 그들은 대단한 것을 깨달은 사람처럼 말하지만 나는 계획대로 되지 않은 일들을 비행기 타기 전부터 이미 너무 많이 겪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초연해지는 마음을 더 얻고 왔다.  


 여행 칼럼니스트 카트린 지타가 말한 여행은 삶이다. 죽음을 통해 배우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인 것처럼 여행을 통해 배우는 것은 삶의 터전을 단단하게 가꿔나갈 수 있게 해 준다.

 나는 당신에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자기 자신을 깊게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무작정 동네 뒷산을 올라 정상에서 벌러덩 눕기도 해 보고, 이리저리 발걸음이 닿는 데로 일상에서 벗어나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때로는 낯선 곳에서 불시착해 볼 만한 용기가 필요하다. 다시 한번 어린 왕자가 되어 완전히 낯선 곳에서 길을 잃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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