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 폴리 아 되 (공유되는 정신의 병)
(영화 조커 폴리아되에 대한 감상인만큼
스포일러는 따라온다)
모두가 매일매일 해야 하는 것이지만 각자의 얼굴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을 가진 것은 뭘까?
그건 수면이다.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것. 그렇지만 벌레를 잡으려면 꼭 일찍 행동케 하는 그것.
그 벌레가 나타나는 시간을 설계한 것이 우리 사회이기에 여기 포함되며 충실히 살아가기 위함을 가르치기 위해 직접 속담까지 되어버리신 개념이 모두가 다른 템포를 지닌 수면까지도 고정시켰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이런 식으로 많든 적든 내 유전자의 템포를 죽이고 누군가 만들어 놓은 흐름에 어느 정도 편승하여 살아야 하는 사회의 책임 속에서 사람 마음의 약함을 먹으며 자라나고야 마는 필연적 암세포. 조커
이 영화에서의 조커는 나에겐 이런 식으로 느껴졌다.
처음엔 조커 외에 비춰지는 작 중의 인물들은 왠지 친근했다. 친근하게 느껴질 정도로 익숙했다.
조커라는 ip의 시즈닝만 살짝 뿌린, 실은 어딘가에 숨 쉬며 살아있는 이들의 모습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치게 만들 정도로.
작 중의 하비는 같은 배경을 영화로 다룬 그 정의만 바라보던 비현실적인 하비와는 동떨어진 내면을 가진 정말로 어딘가에 있을법한 인물이었다.
사회가 정의한 성공궤도에 오른 말끔하고 지적이며, 거만하기도 한 대개의 사회가 포용하고 통용하는 일류 인간이다.
그에 반해 아서 플렉은 어떤가? 점지된 보통에서 한참 벗어난 인간상이다. 힘들 때 분위기도 못 읽고 웃어대는 그런 놈. 그런 그에게 같은 눈높이로 다가가고 싶은가?
할리퀸은 또 어떠했나. 처음엔 아서와 비슷한 길을 걸었던 상처투성이 인간인 줄 알았으나
실은 그저 틀어진 내면의 방출만을 위해 무엇이든 속여대는 그냥 일탈을 즐기는 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난쟁이 퍼들스는 여전히 아서의 유일한 동류다. 날 때부터 무슨 짓을 해도 벗어날 수 없는 태생적인 그 모습은 인간의 외면적 차별에 대한 비판의 테제처럼도 느껴진다.
영화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묻어 나오는 것을 생생히 느꼈다.
사회적 가치에 따른 갈라치기에 의해 생겨버린 불특정 다수의 조커들이 그들 자신에겐 너무나도 불공평한 세상을 불태우고 터뜨리는 것을 감상하며 침잠하였다.
이런 과장적인 영화와 달리 현실이라면 손쉽게 진압될 비공개 상태의 개인적인 불만들.
그런 것들이 조금씩 대두되던 시기에 개봉한 1편에서는 아서와 조커를 동시에 비추고 이입하게 하여
한 개인에게서 터져 나오는 아나키즘에 따른 반향적인 카타르시스를 불러왔지만
2편은 스포트라이트를 조커에게서만 돌려버려 마치 무대공포증을 겪는 사람이 대낮에 발가벗겨진 것처럼
조커가 없는 평범한 인간 아서의 아픔을, 그 아집을 내장 속에서 끄집어낸 느낌이었다.
이렇듯 가볍게는 해석되지 않는 시각적 표현들과 시놉시스는 누군가의 망가진 마음을 보라는 듯이
꽤 난감하고, 약간은 난해하였다.
단순한 시선을 위한 오락성 영화는 아니었다.
조커라는 캐릭터에 집중한 영화도 아니었다.
그저 살기 어려운 사회에 대한 것을 비춘 것조차 아니었다.
고담은 5명의 번듯한 자들의 죽음만을 기억해서 이 죗값으로 그를 몰아세웠지만 아서와 같은 입지를 지닌 뒷방에서 늙어가는 어머니를 죽인것은 죄명에 포함되지도 못했다는 것만 봐도 이 감독이 무엇에 집중하려 한지 영화의 막바지쯤에 알아차려 버렸다.
벗겨내지 못할 정도의 과거와 불치의 태생을 가진 이들에게 조커를 빌려 한번 비춰본 조명.
그런 이들이 여전히 홀로는 노력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곪은 삶을 살고 있다는 지금.
이 영화를 보러 간 모든 이들이 조커라는 상징에만 관심이 있기에 기대를 품고 발걸음을 옮긴 것처럼
작 중 누구도 아서 개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아 조커라는 대상을 가리지 않는 광기가 탄생하였고
그 광기에게 얕게나마 대항한 대단치도 못한 아서의 말로 속에 탄생한 실로 대단한 정의와 혼돈의 서사까지.
그야말로 예술이란 단어에 부합하다 느꼈다.
확대해석이라도 상관없었다.
조커 폴리 아 되. 내 예상보다 더 깊은 음울을 다룬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