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여성풍경
나이가 어느 정도 든 사람들은 누구나 다 만원 버스에 대한 기억 한 가지는 있을 것이다. 지하철이 없던 시절 학교 통학이니 회사 출퇴근을 하려면 모두 버스를 이용하던 그 시절, 통학 시간이면 버스는 숨 쉴 공간도 없이 사람으로 꽉 들어차는 것이 보통이었다. 내 기억에도 학교 가기 위해 만원 버스를 타고 내리면 사람들에게 휩쓸려 아침에 빳빳하게 풀 먹여 달고 나온 교복 카라가 구겨지고, 치마는 반쯤 돌아간 처참한 모습이 되기 일쑤였다. 그것마저도 지금은 애틋한 추억이다. 그런데 이 만원 버스를 능숙하게 관리한 여성 직업인이 있었는데 바로 여차장 혹은 버스 안내양이었다. 버스 회수권을 받고, 겨우 올라탄 승객들을 버스 입구 난간에 매달려 차 안으로 밀어 놓고 ‘오라잇’을 외치던 낭랑한 목소리에 하루가 시작되었다.
버스 여차장이 우리나라에 등장한 것은 1928년 경이다. 1928년 초 경성부청에서 서울 장안의 시민교통을 돕기 위해 20인승 대형버스 10여 대를 들여와 서울시내에 부영버스를 투입하였고, 1931년에 버스걸을 고용하기 시작하였으며, 평양에는 1934년 4월 초닷새부터 버스가 처음으로 개통되었다. 이 ‘버스걸’에 대해 당시의 신문기사는 신종 직업 중에서도 가장 ‘모험적이고 첨단적인 직업’으로 대도회의 중심부를 누비며 모든 모험과 농락과 싸운다는 점에서 가두부인 직업 제일선에 나선 가장 용감한 여성들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1931년 경성의 경우 경성부에서 경영하는 버스에 65명, 경인 버스에 17명, 경수(京水) 유람버스에 수명씩의 「뻐스껄」이 있었다고 한다.(『조선일보』 1931.10.15.)
버스걸 자격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모집 정원이 삼배를 초과하는 가운데서 가장 얼굴이 아름답고 똑똑하고 몸이 튼튼하다는 조건을 가진 여성이 선발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차장의 정복 정모에 넓은 혁대로 허리를 깡둥하게 졸라매고 돈가방을 메고 한 손에 「벤치」 한 손에 차표를 든 무장한 낭자군으로서 이목을 끌었다. 버스 여차장은 새로운 교통 시설인 차를 타는 직업이라 부러운 여성 직업 중 하나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16-19세 미혼녀로 독본 산술, 상식, 신체검사, 구술시험 등을 보고 채용되는데, 특별히 그들은 손아귀 힘이 세야 표를 찍을 수 있었고, 얼굴은 예쁜 것이 좋지만 그만큼 유혹이 따르는 것이 문제라고 한다. 채용이 되면 30일 내지 40일간 수습기간 동안은 하루 40전을 받고 6시 30분부터 10시간 노동하는데 시간당 최저 6전을 받아 18원 정도의 수입이 있었고, 경력이 쌓이면 20원-30원 정도의 임금을 받는다고 한다.
당시에는 어느 정도 자격을 갖추어야 할 수 있었던 부러운 직업이었던 버스걸의 업무는 결코 쉽지 않았다. 긴 노동시간과 하루 종일 한 칸 버스에서 지내야 하는 육체적으로도 힘든 노동이었다. 한 버스걸은 자신의 노동에 대해 ‘ 남이 보기에는 자동차면 타고 다니는 직업이니까 속 모르고 부러워하는 이도 많으나 실은 몹시 피곤한 직업이며 비애가 있는 직업’이라고 토로한다.
“ 손님 중에 불량하신 분이 일부러 우리들을 조롱하느라고 소위 히야까시가 어찌 심한지 모릅니다. 없는 승차표를 내라는 등 일정한 임금을 할인하지는 등 별별 성화가 많아서...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차 속에서 운전수와 말 한마디라도 하는 것을 보면 별별 고약한 소리를 다 지어내는 것이 우리의 제일 가슴 쓰린 일...”( 별건곤 , 1928년 12월호)
근대적 교통 시설과 문화가 확산되면서 이와 연관된 직업으로 ‘버스 운전수’와 ‘가솔린걸’ 등의 직업에도 여성들이 진출하였다. 1930년대 초 기사를 보면 산파업을 하던 이정옥은 수입도 낮고, 재미도 없어 여운전수에 도전했다고 한다. 동양자동차연구소를 찾아가서 운전을 배우고 현장실습을 한 후 여운전수가 되었는데 수입이 높아 만족한다는 기사가 보인다. 또 다른 여운전수 이정희는 숙명여고보를 중퇴하고 일본에 가서 3등 비행사 면허를 받은 경력을 갖고 있는데, 아세아자동차부의 운전수로 일하기도 했다고 한다. 1920년대에 이미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 겸 독립운동가였던 권기옥과 영화 <청연>으로 소개되었던 박경원 등이 비행기 운전에 도전한 기록이 있으니, 참 대단한 여성들이었던 것 같다.
‘가솔린걸’은 자동차의 보급과 함께 기름을 주유하는 주유원을 말하는데, 1932년 기사에 의하면 1932년경 경성에는 1,000여 대의 자동차가 있었으며 1931년에 처음으로 서울 시내에 ‘가솔린 서-비스 스태슌’이 생겨 1932년에 3개소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남자는 점원으로 사용하지 않고 18,9세가량의 꽃 같은 여성만을 사용하였는데, 이들은 유리창이 있는 공간에 앉아 있다가 차가 오면 주유하는 일을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했다고 한다. 한 가솔린 걸은 하루 종일 호스를 들고나면 저녁에는 호스를 들 힘도 없는 힘든 노동이라고 한다. 다른 여성들 같이 고운 의복이나 사치품은 소용도 없으며 매일 상대하는 사람은 운전수 밖에 없지만 거리를 관찰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는 직업이라고 자신의 직업을 소개한다.(조선일보, 1932.1.5.)
새로운 교통시설이 생기면서 거리로 나선 버스걸, 가솔린걸, 여운전수 그리고 비행사 등의 옛 기록을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버스걸은 이제 사라졌지만 100년 전에 아직까지도 희소한 운전수와 비행사의 직업에 도전한 여성들의 기록은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힘들고 어렵지만 당당하게 도전하고, 멈추지 않았던 여성들의 에너지가 아마도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 아닐까?
자료 : “대도회의 구사자 버스껄의 꼬-스톱”,『조선일보』 1931.10.15
“꼿갓흔 아가씨들만을 모은 고속도 모던 뻐쓰걸” 『중외일보』 1929.10.8
「모던 여자, 모던 직업, 신여자의 직업록, 최숙경: 한 간 세상의 여왕 버스걸」 ,
『별건곤』제16,17호, 1928년 12월.
「직업여성면면상 : 깨솔린걸의 십자로에서 외치는 소리」, 조선일보. 193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