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여성풍경
여성과 남성은 생애를 기억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한다. 남성은 ‘내가 과장 진급했을 때’ ‘내가 어떤 프로젝트를 하고 있을 때’라고 일과 관련된 어떤 계기를 중심으로 생애를 기억한다면, 여성들은 ‘첫 아이 태어났을 때’ ‘ 아이가 초등학교 갈 즈음’ 그리고 ‘둘째 딸 결혼할 때’ 식으로 가족의 관계 변화를 중심으로 기억을 정리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통념이 깨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1990년 초에 연구를 위해 1935년 식민지 시기 방직공장에 취업해 해방 이후까지 계속 근무해 30여 년의 방직공장 여직공으로 근무 경력을 갖고 있는 분을 인터뷰하게 되었다. 70이 넘은 나이에 공장 생활만을 하신 분이라 원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걱정하며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첫인상에 단정하고 깔끔하셨고, 두세 차례 만나 이야기를 나눌수록 할머니의 기억이 얼마나 또렷하신지 1930년에서 1960년대까지의 방직공장 이야기를 마치 현장을 보는 것처럼 펼쳐 주셨다. 할머니는 신제품이 나왔을 때, 새로운 기계가 공장에 들어왔을 때와 같은 시기를 중심으로 기억이 연결되었고, ‘무슨 제품의 실이 나왔을 때 내가 첫아이를 출산했어’라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셨다. 그리고 그 당시 나왔던 예쁜 실타래들을 당시까지 간직하고 있다가 보여주시기도 했다. 그 명민함이시라니!
살짝 놀라고 충격을 느꼈다. 6,70년대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여공들이 일터에 나와 일했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공순이’라고 비하하고 무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여성들을 무지한 여성으로 보는 사회적 시선에 나도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놀랍도록 명징한 할머니의 기억의 뿌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적으로 여공에 대한 기록과 서사는 1925년 일본 방적공장 여공의 가혹한 노동실태를 그린 <여공애사, 女工哀史>라는 책으로 대표된다. 1920,30년대는 식민지 조선에도 대규모의 방직공장들이 생기면서 소위 여직공들이 급증하던 시대였다. 노동실태의 참혹함을 비교한다면 제국이었던 일본의 슬픈 이야기를 넘어, 식민지 조선에서 13세-16세 여공들의 참담하고 가혹한 식민지 차별과 억압의 이야기는 풀어내도 풀어내도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 여공들의 객관적 삶과 노동실태의 비참함과 다른 차원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 것 같다.
1934년에 발표된 식민지 소설가 강경애의 <인간문제>는 이 시기 방직여공의 실태를 충실하게 그려낸 노동소설로 알려져 있다. 이 글을 읽다 보면 고된 노동과 현장 감독의 성추행에 괴롭힘을 당하던 주인공이 서서히 각성하여 노동운동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수줍고 순종적인 여성이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노동운동가로 성장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나는 일하는 여성들의 독립적인 자아라는 문제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 연구자는 여공에 대해 일반적으로 ‘순종적인 여성들’이라는 틀로 보려고 하지만, 그것보다는 전통적 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산업사회로 이동하는 시기에 누구보다 먼저 ‘가정 내의 가부장적 억압에서 멀리 떨어지는 경험을 한 여성들’이라는 시점에서 새롭게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공장에서도 가부장적 차별과 억압을 계속 경험하지만, 자신의 위치를 사회적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는 독립성을 획득한 여성들이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식민지 시기 누구보다 먼저 공장 취업을 통해 사회적 생활을 시작한 수만 명의 여성들이 삶의 체험을 통해 당당하고 독립적인 여성의 미래를 만들어간 주역들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후 여성들은 더 많이 취업하고 사회 진출을 위해 애쓰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생애 서사를 써나가는 방식도 어머니의 세대와는 다르게 그려가고 있다. 자신의 일과 노동을 기반으로 보다 독립적인 생활방식을 추구해 나가는 현재의 우리 여성들 뒤에는 지난 100여 년간 삶의 체험을 통해 새로운 기억과 주체적인 자아를 만들어 간 수많은 여직공들의 기억이 함께 하는 것 아닐까 싶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이 다가오고 있는 어느 날 떠오른 생각의 한자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