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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롱뇽 Jan 19. 2023

신은 존재할까?

전지전능과 자유의지, 그리고 나의 마음


25년이란 지난 짧은 인생을 돌이켜보면 종교와 난 희한하게도 딱 붙어 지냈다. 초등학생 땐 친구관계의 대부분이 성당 친구들이었고, 중학교 때도 성당에 열심히 다녔다. 냉담했던 고등학생 시절엔 미션스쿨을 다녔고 지금은 예수회 계열의 대학에 재학 중이다.


​신의 존재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것은 고등학생 때부터였다. 우리 고등학교엔 매주 1회 종교라는 수업 시간이 있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고된 공부를 보상받는 꿀잠시간으로 보냈지만, 난 그때 처음으로 종교에 대해 진정한 고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목사님께서 종교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르쳐주셨기 때문이다.


앞으로 적어나갈 내용은 그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고민했던 흔적들이다.




이 이야기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신이 존재하길 간절하게 소망한다. 하지만 신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신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선 신이 무엇인지 정의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널리 전파된 가톨릭에서의 신은 선한 존재이며 모든 것을 알고(전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전능)을 가진다.


필자의 생각으론 신의 선악구별엔 주관적인 가치판단과 논쟁이 있으니, 논의를 단순하게 하기 위해 신이라는 존재의 최소요건으로 전지전능함을 삼겠다. 사실 선악구분을 차치하더라도 전지전능한 존재가 곧 신이라는 명제엔 종교의 유무를 떠나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우리 인간은 큰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 딜레마는 ‘인간은 신을 믿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신은 전지하기에 우리 인간이 과거에 무슨 일을 했는지, 현재에 하고 있는지, 미래에 할지 모두 알고 있다.

또한 전능하기에 내가 어떤 일을 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었다. 즉 우리가 어떤 행동과 사고를 해도 신의 손바닥 위에 있을 뿐이다.


우리 인간 중에 누가 신을 믿을지 믿지 않을지, 사람을 죽일지 죽이지 않을지,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 그 모든 것을 신은 알고 있고(전지), 그렇게 만들 수 있는 능력(전능)을 가졌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을 믿는 것도, 종교를 갖는 것도 모두 정해져 있는 일인데 왜 우리는 굳이 종교생활을 하고 신을 믿는 수고를 해야 하는가?


우리는 구태여 신을 믿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고 사고하든 우리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운명론).


운명론은 칼뱅주의 교리의 예정조화설(=구원예정설)과도 맞닿아있다. 구원은 사전에 예정되어 있고 인간은 그것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신부님, 목사님, 교수님께서 반박하시는 소재가 있었다. 인간의 자유의지이다.

모든 것은 정해져 있다는 운명론을 부정하는 자유의지로 모든 것을 반박했다. 우리 인간은 내 의지 내 뜻대로 결정하고 인생을 살아간다는 자유의지.


진정으로 그들 말대로 자유의지가 있다면 전지전능한 신은 없다고 그들 자신이 주장하는 셈이다.


왜냐하면 첫째,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 순간 인간이 자유의지로 결정을 한 후에야 미래가 결정된다. 즉 신은 인간이 행동한 이후에 미래를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신은 전지하지 않고, 그러한 미래가 신의 뜻에 반하는 미래라면 그것을 막지 못했기에 전능하지 않다.


둘째, 신이 존재하는 의미가 퇴색된다. 신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의 생애를 관찰하며 채점표를 들고, 착한 일을 하면 1점을 주고 나쁜 일을 하면 1점을 차감하여 죽을 때 그 점수대로 천국과 지옥을 보낸다고 결정하는 존재인가? 자유의지가 있다면 신은 필연적으로 인간에 뒤따를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적어도 전지함을 잃은 반신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존재가 신인가?


이 질문에 대해선 아직까진 그 누구도 나에게 명쾌한 답을 내려주지 못했다. 게다가 이에 더해 자유의지가 과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연구결과까지 이미 나오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리벳실험 참고).



​이후 전지전능한 존재는 없고,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굳어진 채 살아갔다. 그러던 중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할머니께서 과거 암 투병과 심장수술로 생사의 기로에 놓인 순간이었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굳게 생각했던 나조차, 신에게 한 번만 도와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그때 깨달았다. 인간은 나약하기에 절체절명의 순간엔 결국 어떤 절대적인 무엇인가에 기대려 한다. 그리고 그 순간에 떠오르는 존재는 바로 신이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신이 존재하길 바라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겪은 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신이 존재하길 바라며, 위에서 말한 논의가 유효하면서도 신이라 납득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지금은 경기장의 심판과 같은 존재가 신이 아닐까 생각한다.


선수들이 안심하고 플레이할 수 있도록 규칙을 수호하고, 규칙을 어기면 응당한 처분을 내린다. 선수들은 심판에 항의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심판의 절대성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경기가 진행될 수 없는 상황이 아니고서야 심판은 경기에 개입하지 않는다. 각각의 선수들은 자유의지를 갖고 플레이하며 어긋나는 부분은 심판이 개입하여 조정한다.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말한 정부의 역할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영화 이터널스에서 아리솀이라는 존재가 이와 가깝다고 느꼈다. 이것이 전지전능한 신과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고민의 종착지였다.

신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조금은 덜 완벽할 수 있다.


사실 이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신에 대한 논쟁은 우주가 사라질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다만 그 속에서 나의 논의가 신에 대한 탐구에 한 걸음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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