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군자가 소나무일 필요는 없다

버팀을 강요받는 사회 속에서

by 이정빈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매난국죽이라 불리는 식물들은 흔히 유교에서 군자를 표상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에 ‘소나무’를 추가하여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강조하곤 한다. 소나무는 상록수이기에 겨울에도 잎을 떨구지 않는다. 유교에서 말하는 군자의 모습 역시, 상황이 바뀌어도 도리를 바꾸지 않는 존재, 이익보다 절개를 택하는 태도, 즉, 늘 푸름을 유지하라는 태도이다. 나는 그 가치가 오래도록 옳다고 믿어왔으나, 소나무의 올곧음이 언제나 숭고하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겨울을 견딘다는 말은, 다른 선택지를 원천봉쇄 한다는 의미 아닌가. 변하지 않는 모습이 미덕이 되는 순간, 흔들림은 나약함으로 취급받고, 조금의 한탄은 곧 뒤처짐으로 취급된다. 하지만, 이런 부분을 보고 소나무라는 자연물이 갖는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올곧음이 하나의 기준으로 자리매김하는 순간, 소나무는 더 이상 상징이 아니라 잣대가 된다. 각자에게 주어진 계절과 체온을 고려하지 않은 채, 모두에게 같은 겨울을 견뎌내라 요구하는 기준. 그 앞에서 흔들린다는 것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질타의 대상이 된다. 버텨낸 사람의 선택은 존중받아 마땅하나, 그 선택이 타인의 삶을 재단하는 채점표로 격상될 이유는 없다. 누군가는 악으로 깡으로 버틸 수 있고, 누군가는 물러남으로 도리를 지킬 수도 있다. 또 누군가는 잠시 굽히고,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 변화하지 않음이 미덕이 되는 순간이 있듯, 변화할 수 있음 또한 책임 있는 태도일 수 있다. 군자의 도리는 단 하나의 자세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끝까지 자신을 속이지 않는 데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꺾이지 않는 마음을 단편적인 대상으로 소비하는 이 세태가 안타깝다. 결과만을 놓고 의지를 평가하고, 중간의 망설임과 조정을 실패로 환원하는 태도 속에서 많은 마음들이 조용히 탈진한다. 중간 과정이 어떠했든, 자신이 지키고자 한 가치를 끝까지 붙들려했다는 사실 자체가 더 중요하지 않은가. 사회 초년생이 겪는 수많은 좌절 역시, 그들이 유난히 나약해서 생겨난 문제라기보다, 견딤만을 미덕으로 삼는 환경 속에서 선택지를 충분히 허락받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경우가 더 많다.

소나무는 겨울을 견딘다. 그러나 모든 식물이 소나무일 필요는 없다.

어떤 것은 꽃으로 계절을 버티고, 어떤 것은 뿌리를 숨긴 채 때를 기다린다. 군자의 덕 또한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꺾이지 않음만을 숭상하기보다, 꺾이지 않으려 애썼던 마음의 결을 살필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도리는 살아 있는 가치가 된다.

절개는 남에게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떳떳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갖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