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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레 Jun 14. 2023

가을날의 코모 호수

Lago di Como

  사르데냐에 다녀온 후, 나는 이탈리아어 레벨테스트를 보고 A1(기초 다음 레벨) 수업을 등록했고, 10월에는 체류허가증(Permesso di Soggiorno)을 수령했다. 드디어 다른 솅겐 국가로의 여행이 가능하게 됐지만 신청 시작일로부터 1년에 불과한 짧은 기간과 늦어진 발급으로 인해 세 달 후가 만료인 상황.. 그래도 두 달 후에 연장 신청을 시작하면 여름 전에는 2년짜리 체류허가증이 발급이 될 터였다.(는 것은 헛된 희망이었다.)

 

  우리는 다른 유럽 국가로의 여행이 가능한 이 짧은 기간을 그냥 보내기가 아쉬워서 10월에 비행기를 타고 바르셀로나에 짧게 다녀왔다. 비수기에 유럽 국가 간의 비행기 표는 정말 싸서 수화물 없이 라이언에어를 이용하면 왕복 34유로, 한 명에 5만 원도 되지 않는 가격이다. 비자도 있고 시간도 있으니 안 갈 이유가 없었다.

 

  바르셀로나에 다녀오고 약 2주 후에는 캠핑카를 끌고 코모 호수에 다녀왔다. 그리고 그 며칠 후에는 파리, 그 후에는 당일로 아스티와 밀라노, 12월 초에는 보르고말레, 12월 중순에는 발렌시아에 다녀왔으니, 참 부지런히도 다녔다.

 

  그렇게 다닌 이유는 사실, 내가 집에 있는 시간을 점점 견디기 힘들어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녔어도 그 짧은 여행들 사이 사이의 시간들이 깊은 어둠과도 같아서 내내 그 어둠에 잠식된 기분이었다. 여행할 때만 잠깐 숨이 트이고 빛이 들어오다가 다시 어둠속으로 가라앉는 기분. 그 채워지지 않는 결핍과 깊은 우울감은, 삼십 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내 인생을 구성해 온 모든 것을 한 번에 버린 대가였던 것 같다.

 

  모든 것을 끊어낸 홀가분함과 새로운 세상을 만난 기쁨이 고통으로 변하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걸린다. 그것은 마치 충격파처럼 시간을 두고 갑자기 밀려와 마음을 초토화시킨다.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전의 삶을 통째로 잃는 거대한 상실을 견뎌야 한다는 걸, 나는 뼈저리게 체감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깊은 내향인인 내가 외향적인 외국인 어머니 댁에 얹혀 살고 있으니 괴로움은 배가 되었다. 어머니와 피노는 너무 좋은 분들이고 함께 지내는 내내 다정하게 대해 주셨지만, 정신적으로 아무 에너지도 남아 있지 않고 기분이 바닥을 뚫고 내려간 상태에도 늘, 피할 곳 없이 타인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두 분께 감사하고, 함께하는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괴로워지는 마음을 이해하는지..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끊임없이 다음 식사 시간이 돌아오고 내일이 돌아오고, 서툰 외국어로 할 수 있는 말도 하고 싶은 얘깃거리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데 내가 즐겁게 대화에 참여해 주기를 기대하는 얼굴을 계속해서 마주해야 하는 괴로움을.

 

  나는 끊임없이 돌아오는 식사 시간과 어머니가 원하는 내 모습과 기분을 꾸며내는 데에 지쳐가다 결국 번아웃이 왔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셨고, 함께하는 시간들은 점점 더 불편해져서 그 즈음에는 식사 시간이 가까워지면 숨이 막힐 지경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는 그저, 유일한 며느리인 나와 친모녀처럼 살갑고 유쾌하고 애정 어린 관계를 원했을 뿐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게 나에게 부담스럽고 버거울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 하셨다는 것도. 내가 정말 속상한 것은, 이렇게까지 기간이 길어지지 않았다면 기꺼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마지막까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거라는 사실이다. 계획대로라면 두세 달 정도만 차를 고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우리는 긴 여행을 떠났어야 하는데, 생각보다 비싼 물가와 체류허가증 발급 지연 때문에 여행하는 시간보다 시어머니 댁에 머무르는 시간이 훨씬 길어져 버렸다.

 

  팔을 앞으로 뻗어 물병을 들고 있는 것 같은 시간들이었다. 잠깐 들고 있는 것은 전혀 힘들지 않지만 그 시간이 끝없이 이어져 고통이 되는.. 남들은 이해 못 하는 괴로움. 그게 내가 처한 상황이었다. 나는 그 물병을 잠시라도 내려놓기 위해서 계속해서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11월 5일, 주말을 끼워 2박 3일 동안 코모 호수에 갔다. 밤에는 춥고 낮에는 바람이 선선하고 햇볕이 따사로운 완연한 가을 날씨였다. 오랜만에 캠핑카를 타고 떠나니 해방감이 느껴졌다. 캠핑카를 타고 떠날 때만큼은 자유로운 우리.

 

  알레산드리아에서 동북쪽으로 한 시간 정도 가면 밀라노가 나오고 밀라노를 지나 50km쯤 더 가면 코모 호수가 나온다. 우리는 고속도로를 타고 밀라노 외곽을 돌아 지나쳐 계속 달렸다. 코모 호수의 아래쪽에 있는 작은 마을의 무료 주차장에 도착하기까지 두 시간 정도 걸렸다.

 


  첫날에는 그냥 호수변을 따라 걸었다. 집을 떠나온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화롭게 들떴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고, 푸르고 잔잔한 호숫물과 그 너머로 단풍이 든 산들이 아름다웠다. 왼쪽으로는 호수 너머 멀리 하얗게 눈이 쌓인 산들이, 오른쪽을 보면 호수 끝에 코모 도시가 보였다. 마침 근처에 선착장이 있어 다음 날 배를 타고 도시를 보러 가기로 했다.

 


  다음 날도 날이 선명하게 맑았다. 오전에는 너무 추워서 계속 차 안에 있다가 점심을 일찍 먹고 배를 타고 코모로 갔다.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가을날, 한낮의 코모 거리를 걷고 있으니 신이 났다. 마침 주말이라 빈티지마켓이 열리고 있어 길가와 광장의 판매대에서 그림과 물건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남편은 별로 관심이 없지만 나는 이런 자잘한 빈티지 물건들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누군가의 정성스러운 손길을 탄 물건들을 보는 것이 좋고, 특유의 분위기도 좋고, 화려한 옷들과 가방, 선글라스, 보석류에다 온갖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섞여 있어 재미있다.

 


  가장 좋았던 건 진한 햇빛이 길게 드리우는 호숫가를 걸을 때였다. 많은 사람들이 걷거나 누워서, 혹은 호숫가 바의 야외 자리에 앉아서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한적한 제방을 찾아 걸터앉았다. 햇볕은 살짝 덥다 싶게 따뜻하고 바람은 선선해서 야외에 앉아 있기 좋은 날이었다.


 

  우리는 말없이 윤슬이 반짝이는 호수를 바라봤다. 눈이 부셔 오래 바라보지 못하고 아래로 시선을 내리면 백조들이 유유히 발밑을 지나갔다. 조용하고 따사로운 풍경. 마음에 햇빛이 들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듯한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11월의 코모 호수는 해가 지자마자 초겨울처럼 추워진다. 추위를 피하려고 5시도 되기 전에 배를 타고 타베르놀라(Tavernola)로 돌아왔지만 캠핑카를 세워 둔 무료 주차장 근처는 이미 산에 가려 햇빛이 없었다. 차가운 공기가 옷속을 파고 들어 서둘러 캠핑카로 들어갔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전날 장을 봐 둔 재료들로 평범한 저녁을 만들어 먹었다. 쌀쌀한 공기와 깜깜한 어둠 속에서 전날과 마찬가지로 담요를 둘둘 말고 넷플릭스 영화를 두 편 보고 솜이불에 담요를 겹겹이 덥고 잠들었다. 그리곤 아침에 일어나 덜덜 떨며 커피를 내려 마시고. 그 2박 3일의 대부분은 그런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마음 편하고 좋을 수 없었다.

 

  타인을 의식할 필요 없이 그저 나로 존재할  있는 공간과 시간.  작은 캠핑카가 나에게 주는 것은 그런 거였다. 그것은  같은 사람이 캠핑카 여행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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