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rdegna 마지막 이야기
사르데냐에 처음 도착한 날, 기대감이 가득했던 우리에게 크나큰 실망을 안겨 줬던 레 살리네 해변(Spiaggia Le Saline).
여행의 끝자락이 되어 우리는 의도치 않게 그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사르데냐 섬을 반 바퀴 돌고 처음 출발한 쪽으로 다시 돌아와 라 펠로사라는 유명한 해변에 갔던 날이었다. 해변 주변에 캠핑카를 세울 장소가 전혀 없어 멀리 떨어진 도로변의 작은 주차공간을 이용해야 했는데, 도로 바로 옆이면서 인적 없는 곳이라 절도와 강도에 취약하기도 하고 코앞에서 차들이 쌩쌩 달려 시끄러운 탓에 밤을 보내기 힘들 것 같았다. 게다가 그날 밤 폭우 예보까지 있어서 어찌할까 하다가, 처음 갔던 레 살리네 해변의 넓고 쾌적한 무료 주차장을 떠올린 것이다.
해질 무렵, 무료 주차장에 도착하자 하늘에 넓게 퍼진 구름이 핑크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노을이 번지는 하늘이 너무 예뻐서 해가 지기 전에 산책을 한 번 하기 위해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우리는 얕은 습지 위에 놓인 나무다리를 건너 해변으로 갔다. 해변을 따라 낮은 언덕처럼 지대가 솟아 있어 그곳을 넘어가야 바다를 볼 수 있었는데, 이전에 해변 가득 죽어 썩어가는 해초들로 거뭇했던 해변을 기억하며 아무런 기대 없이 지금은 좀 어떤가 보자는 마음으로 그쪽으로 걸었다.
언덕을 넘어 해변에 섰을 때, 눈앞에 펼쳐진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색색깔로 빛나는 환상적인 바다가 거기 있었다. 투명하고 영롱한 푸른 물에 노을이 비쳐 물결이 칠 때마다 바다 표면이 분홍빛, 보랏빛, 푸른빛으로 매끄럽게 빛났다. 하늘에는 크고 하얀 달이 떠 있었고, 2주 전 해변과 바다에 가득했던 죽은 해초들이 거의 말끔하게 사라져, 작고 동글동글한 자갈 해변이 말갛게 드러나 있었다.
말문이 막혔다. 눈앞의 풍경 자체도 감탄스러웠지만, 이전에 어땠는지 알기에 놀라웠다. 내가 본 중 최악의 해변이었는데, 불과 2주 만에 이렇게 전혀 다른 해변이 되어 있다니. 하마터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인 줄 모르고 영원히 오해한 채로 살아갈 뻔했다.
자개처럼 매끄럽게 빛나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동안 내가 봐 온 해변들을 새삼 떠올렸다. 이곳은 이런 바다, 이런 해변이구나 하며 무민이 바다색 표본을 만들 듯이 잘 보고 마음과 머릿속에 기억했던 바다들을. 그 바다는 지금 어떤 빛깔일까.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일까. 해변 상태와 바다 빛깔에 이 정도로 큰 기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때 처음 실감했다.
다음 날, 간밤에 천둥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진 후 날씨는 한결 개었다. 우리는 다시 라 펠로사(La Pelosa)로 갔다. 라 펠로사는 샤르데냐 북서쪽 끝에 있는 아름답기로 유명한 해변이다. 하루에 정해진 인원만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을 받아 입장시켜 주는 곳으로, 해변에서도 대자리 같은 것 없이 모래사장에 바로 비치타올을 까는 일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어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전날 주차했던, 해변에서 멀찍이 떨어진 도로변 작은 주차장에 주차를 해 두고 자전거를 타고 20분씩 걸려 그 해변으로 갔다. 도로변을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것도 불안하고, 주차한 자리가 너무 길 바로 옆이라 캠핑카가 범죄에 노출될까 봐 걱정도 되었지만 첫날 가 보고 완전히 반해 버려 그날 바로 하루 더 예약했던 것이다. 사르데냐에서 우리가 가 본 해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이었다.
이날도 구름이 있긴 했지만 전날보다 날씨가 조금 더 좋았다. 하루 종일 수영을 하다가 햇볕을 쬐다가 살짝 잠들기도 하면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나는 해변에서 낮잠 자는 것을 좋아한다. 따끈한 햇살과 선선한 공기 속에서 잔잔한 파도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가 깰 때의 나른함이 좋다. 나는 보통 낮잠을 자게 되면 깰 때 몸도 무겁고 두통이 밀려오곤 해서 여간해서는 낮잠을 자지 않는데 해변에서는 늘 편안하게 잠이 들고 기분 좋게 깬다.
우리는 차로 돌아갔다가 아쉬운 마음에 다시 자전거를 타고 라펠로사로 왔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해변과 분홍빛으로 물드는 하늘, 하얗게 떠오른 달을 바라봤다. 그날은 9월 18일이었다. 사르데냐에서 보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우리는 이제 그만 포르토 팔마스로 돌아가기로 했다. 포르토 팔마스는 여행 초반에 좋은 시간을 보냈던, 작지만 아름다운 해변이다. 우리가 사르데냐를 한 바퀴 다 돌지 않고 반만 돈 것도, 이 시기 남쪽 바다는 파도가 좋지 않다고 듣기도 했지만 무리해서 사르데냐를 한 바퀴 돌기 보다는 좋아하는 곳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그렇게 아름다웠던 포르토 팔마스의 해변은 거센 바람과 함께 성난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죽은 해초도 꽤 밀려 와 있었다. 레 살리네 해변과는 반대로, 이곳은 이때가 안 좋은 때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이곳을 사랑하게 된 우리는 그래도 머무르기로 했다. 바람을 피해, 해변에 납작 엎드려 책도 읽고 과자도 먹으며 하루를 보냈다.
그날 밤에는 거의 폭풍우급의 바람이 몰아쳐서 배를 탄 것처럼 차가 마구 흔들릴 정도였고, 아침에도 여전히 높은 파도가 거세게 일고 있었다. 어둡고 깊게 요동치는 바다를 바라보며, 이전과 같은 바다임을 떠올리기가 어려웠다. 그저 바람이 좋지 않았을 뿐인데, 이곳 바다는 이제 내가 알았던 것과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사르데냐의 이 아름다운 해변들도 크나큰 기복이 있다는 사실이, 며칠 만에 이렇게 좋았다가도 나쁘고 나쁘다가도 좋아지곤 하는 것이 자연의 순리라는 것이 나에게 큰 위안이 되어 주는 것이었다. 사르데냐의 천국 같은 해변들도 죽은 해초가 밀려와 해변을 뒤덮고 거친 파도가 속을 다 긁어 엉망으로 만드는 그런 때가 있다면, 자연의 일부인 사람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런 시기가 오면 자연도 사람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저 그 시기가 지나고 바람이 가라앉고 파도가 잦아들고, 마음에 가득 밀려왔던 까만 해초가 멀리 밀려나기를 기다릴 뿐. 누구에게나 그런 시기가 있음을 안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좀 더 너그러워도 되지 않을까. 내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