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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레 Aug 04. 2023

신들의 해안이라 불리는 그곳

Tropea

  이탈리아에는 꼽자면 양손에 양발까지 다 써야 할 정도로 멋진 도시가 많지만, 진정한 이탈리아의 매력은 작은 마을들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풍경과 이탈리아 특유의 진한 낭만을 간직한 보석 같은 마을들. 나폴리의 아말피 해안에 자리한 작은 마을들 같은, 풀리아 주의 폴리냐노 아 마레와 같은. 그리고 칼라브리아 주에는 무려 신들의 해안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깎아지른 절벽 위로는 그림 같은 마을이, 아래로는 아름다운 해변이 이어지는 정말 신들의 휴양지 같은 곳.

 

  마침 그곳의 캠핑장이 위치와 시설도 좋고 아직 시즌 전이라 가격도 적당해서, 우리는 시칠리아로 가기 전 남은 2박 3일을 트로페아에서 보내기로 했다. 물을 갈아야 하거나 전기를 꼭 써야 하거나 샤워를 못 한 지 3일이 넘어간다거나 하는 게 아니면 캠핑장에 가지 않는 우리에게 해변 근처 캠핑장에서 2박 3일을 보낸다는 것은 휴가나 마찬가지인데, 게다가 신들의 해안이라 이름 붙은 아름다운 해변이라니!


  설레는 마음으로 트로페아로 가는 길가에는 보라색 양파를 쌓아 놓고 파는 노점들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트로페아 양파라고 불리는 이 양파는 보기에는 그냥 길쭉한 자색 양파 같지만 세상에 둘도 없는 특별한 양파다. 진물 없이 투명하고 양파 특유의 냄새나 아린 맛이 전혀 없는, 얇게 썬 사과처럼 사각사각한 이 양파를 샐러드에 넣어 먹으면 샐러드가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나 감동하게 된다. 정말로, 먹을 때마다 감동했다.


  우리는 트로페아에 들어갈 때 한 봉지 사고 나올 때 또 한 봉지 사고, 시칠리아에 가서도 나중에 알레산드리아에 돌아가서도 내내 이 양파를 찾아다녔는데 다른 지역에서 찾은 트로페아 양파는 현지에서 사 먹었던 것에 비할 수가 없어 아직도 그 맛을 그리워하는 중이다. 양파가 이렇게 맛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현지에서 식재료를 사서 요리해 먹는 캠핑카 여행이기에 가능한 발견이었다.

 


  우리가 트로페아 양파를 산 것은 트로페아 마을 밖, 도로변에 있는 큰 가게였다. 저렴한 가격에 과일과 야채, 칼라브리아 특산물을 팔고 주차장도 넓어서 그곳에서 장을 봤다. 가게 밖에는 역시 트로페아 양파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는데 그때는 양파가 뭐 달라 봐야 얼마나 다르겠나 싶어서 조그만 걸로만 조금 샀다. 체리도 1kg에 3유로밖에 하지 않아 한 봉지 사고, 큼직한 납작복숭아도 한 팩에 4유로밖에 하지 않아 얼른 담았다.

 


  과일과 야채 외에도 매운 고추를 넣은 칼라브리아의 특산품들이 넓은 진열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칼라브리아 사람들이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고추가 들어간 매운 술, 매운 스프레드, 매운 파스타 소스, 매운 초리소, 매운 초콜릿 등등을 구경하다 보니 이 사람들, 정말 매운 맛에 진심이구나 싶었다. 고심 끝에 매운 맛 스프레드 두 가지와 매운 초콜릿 하나를 골랐는데 나중에 먹어 보니 정말 제대로 매운 맛이어서 기뻤다.

 

  그리고 납작복숭아. 아.. 이 납작복숭아는 그때까지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내 인생 가장 맛있는 납작복숭아로 남아 있다. 그동안 납작복숭아를 종종 먹었는데도 이건, 부드럽고 달콤하고 향긋하고 과즙이 가득해서 마치 천상의 과일 같았다. 이 가격에 이런 납작복숭아를 먹을 수 있다면 그거 하나로 칼라브리아에서 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반면 체리는 벌레 먹은 게 많아서 실패.. 어쩐지 가격이 너무 싸더라니.

 

매운 버섯 스프레드와 트로페아 양파를 넣은 샐러드, 계란프라이. 이 정도면 호화로운 점심이다.


  트로페아의 캠핑장은 마을이 있는 절벽과 해변 사이에 있었고, 넓고 나무가 많아 쾌적했다. 다른 차와의 거리가 좁긴 했지만 어차피 밖에 있는 시간이 많아 크게 신경 쓰이진 않았다. 캠핑장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므로 보통은 조용하게 지낼  있다. 다만 가까운 다른 캠핑장에서 밤늦게까지 음악을 크게 틀고 가라오케 파티 같은 것을 열어 시끄러웠는데, 여름에 이탈리아의 바닷가에서는 일상적인 일이라 그냥 참아야 한다. 가만히 들어 보니 나이  분들이었다. 젊은 우리는 자리에 누워 조용히 잠을 청하고, 나이  분들은 늦게까지 춤을 추고 노래하며 활기차게 밤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다.


  트로페아의 캠핑장에는 아침마다 과일과 생선을 파는 작은 트럭들이 온다. 이 귀여운 트럭은 아페(Ape)라는 오래된 삼륜차로,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서는 아페가 좁은 골목을 누비는 모습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캠핑장 안을 돌아다니는 아페는 처음이어서 신기하긴 했지만 과일은 이미 잔뜩 있으니 과일 트럭은 패스, 좁은 차 안에서 냄새가 배는 생선 요리를 할 수는 없으니 생선 트럭도 당연히 패스인 줄 알았다.


  그래서 남편이 생선 트럭에 다가가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눌 때만 해도 그런가 보다 했는데, 잠시 후 돌아온 남편 손에는 세상에, 종아리 만한 생선이 들려 있었다. 내장만 빼고 머리도 그대로 달려 있는 참치였다. 아저씨가 새벽에 낚시로 잡은 참치 한 마리를 20유로 주고 사 온 것이다. 나와는 상의도 없이.

 

  이 남자는 우리가 냉장고도 없이 쿨러만 있는 처지에, 냄새 나는 요리를 하면 옷이고 소파고 침구고 모든 곳에 냄새가 배는 캠핑카에서 살고 있다는 걸 잊은 걸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걸 샀는지 묻는 내게 남편 왈, 신선한 참치를 이 가격에 살 수 있는데 어떻게 안 사.

 

  우리는 그날 점심으로 참치 구이, 저녁으로 참치 파스타를 먹었다. 남은 생선을 쿨러에 넣어 두고 상할까  전전긍긍하다 저녁도 일찍 먹었다. 어차피 사 버린 거 협조하긴 했지만, 내가 뭐 작은 거라도 하나라도 사고 싶어 하면 낭비벽이 있는 사람 취급을 하면서 자기는 나와는 상의도 없이 나름 큰 돈을 써 버리고 일을 벌이는 게 짜증스러웠다. 사실 괜히 아까운 시간도 많이 버리고 여러모로 번거롭기 짝이 없고 솔직히 맛도 그렇게 특별하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백 번 양보해서 이탈리아 칼라브리아  바다에서 그날 잡은 참치를 사서 먹어 봤다는 것만으로 특별한 경험이었다 생각하고 용서해 줬다. 정작 하루 종일 생선과 씨름한 남편은 다시는 생선을  사겠다고 선언했지만 말이다.

 


  트로페아에서 보낸 2박 3일은 정말 손에 꼽게 좋은 날들이었다. 우리는 낮에는 캠핑장에서 가까운 해변으로 가서 투명하도록 맑은 물에서 수영을 하고, 오후 늦게 돌아와 야외샤워장에서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한 후 옷을 갈아입고 아직 뜨거운 햇살 아래 젖은 수영복과 수건을 걸어놓고 캠핑장을 나섰다. 도로를 건너 계단을 올라 절벽 위 마을로 갔다. 해가 길어 시간이 늘어지듯 천천히 흘러갔다. 바다를 바라보다가 마을을 구경하다가 거리가 노을에 물들기 시작하면 아란치니와 맥주를 사서 풍경을 바라보며 먹었다. 마을과 절벽과 바다가 그림처럼 어우러지는 풍경 속에서.  

 


  이탈리아의 마을들은 건물 자체도 예쁘고 분위기 있지만 자연과 기가 막히게 어우러진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건물의 모양도 색깔도, 풍경 속에서 어느 것 하나 튀는 부분 없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다. 특히 해질 무렵, 진한 햇빛에 물든 건물들이 풍경과 함께 자아내는 낭만이란.


  사실 그날 일몰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었다. 오렌지빛으로 물드는 풍경에 이미 만족하기도 했고, 옅은 구름이 넓게 퍼진 하늘이어야 멋진 노을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터득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날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어서, 태양은 수면 위로 빛을 뿌리며 홀로 빛나다가 조용히 사그라질 운명이었다. 그런데 일몰이 다가오자 먼 바다 위로 옅은 구름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석양이 구름을 타고 온 하늘로 번져갔다. 밝은 주황빛으로 빛나다가 진한 주황빛으로 색이 더해지며 하늘과 바다를 물들이는 석양, 수면 위로 드리워진 빛의 강, 그리고 주황빛에 분홍빛이 더해지며 깊고 진한 색감으로 어두워져가는 하늘. 시시각각 변해 가는 하늘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윽고 수평선 너머로 해가 가라앉고 진한 핑크빛 노을이 수평선을 따라 번지기 시작할 때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감동해 가슴이 먹먹했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마음인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보라빛으로 어두워져가는 풍경을 말없이 함께 바라보았다. 해는 날마다 뜨고 지지만 이런 노을은 인생에 몇 번 없을 것임을 어렴풋이 느끼면서.



  세상이 보랏빛 어둠에 잠기고, 우리는 여운에 취해 휘청휘청 캠핑카로 돌아왔다. 이대로 잠들기는 아쉬워서 우리만의 미니 바를 열었다. 미니 바라고 하기거창한 것이 캠핑카에 알전구를 걸고 이가 빠진 플라스틱 와인잔에 2~3유로짜리 싸구려 와인을 따라 마시는 것뿐이지만. 하지만 찬란했던 석양의 여운과 진한 낭만으로, 그날의 와인은 돈으로   없는 맛이 났다. 우리는 이런 순간을 위해서 이렇게 여행하고 있는 것이지, 살아있다는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 술에 취해 낭만에 취해 그런 얘기를 두서없이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여행이 인생을 바꾸는 순간이 있다면 이날도 그런 순간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그날로부터 일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마음은 문득문득, 트로페아의 절벽 끝에서 석양을 바라보던 그때로 되돌아가곤 한다. 공기마저 노을에 물든 듯했던  순간으로. 그리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에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이 새삼 기뻐서 마음이 뭉클해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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