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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레 Sep 21. 2023

체팔루에서 만난 은인

Cefalù, Sicilia

  체팔루(Cefalù)에 도착한 것은 시칠리아 메시나 항구에 내린 지 2박 3일 만이었다. 좌우로 길쭉한 역삼각형인 시칠리아의 북쪽 해안을 동쪽 끝에서부터 반 이상, 무려 165km나 달려온 끝에.


  그날, 해안에 바짝 붙은 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 무심코 내다 본 물빛이 어느덧 에메랄드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바다 좀 봐! 예쁘다!!” 감격해 소리치니, 남편이 덤덤하게 체팔루에 거의 다 왔다고 했다. 체팔루에 왔으니 당연하지, 라는 태도였다. 영화 <시네마천국>의 야외촬영지로 알려져 있고, 마을과 어우러지는 해변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그곳. 드디어 시칠리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으리란 기대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남편이 차를 세운 곳은 내 기대와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체팔루에서 캠핑카를 주차할 수 있는 곳이 마을 외곽의 주차장뿐이었기 때문이다. 주차할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한 상황이긴 했지만 차를 주차해 두고 뙤약볕 아래를 한참을 걸어야 했던 그날은 정말이지 엄청나게 더운 날이었다. 이미 에어컨도 선팅도 햇볕가리개도 없는 차를 타고 뜨거운 햇볕을 온몸으로 맞으며 장시간 이동한 데다가 3일 동안 샤워도 못 하고 땀에 찌든 상태였으니, 차에서 내려 바람 한 점 없는 습한 공기와 온몸을 태울 듯 한층 더 뜨거운 햇볕, 달궈진 바닥이 뿜어내는 열기가 더해지자 사기가 꺾였다. 아, 샤워라도 할 수 있으면 정말 좋으련만.


  우리는 끈적한 몸에 땀을 줄줄 흘리며 도로변을 걸었고, 20분 정도 후 체팔루 구시가지로 들어섰다. 낡아서 오히려 분위기 있는 예쁜 건물들과 포도나무, 야자수, 파라솔을 펼친 레스토랑과 바, 대성당, 시칠리아 특유의 화려한 색과 무늬의 도자기로 꾸며진 거리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거리를 걷고 있자니 미국인으로 보이는 관광객이 유독 많았는데, 훤칠하고 수려한 용모에 깨끗하게 다려진 린넨 셔츠 차림인 경우가 많았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다들 호텔에서 샤워를 마치고 갓 나온 듯 뽀송하고 산뜻해 보여 나도 모르게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무더위에 하루 종일 땀을 흘리면서도 3일이나 샤워를 못해 온몸이 땀에 절고 머리에는 기름기가 흐르는 내 모습이 의식되어 어쩔 수 없이 기가 죽었다.


  이런 아름다운 곳에서 이런 몰골이라니. 다음에 또 이곳에 오게 된다면 그때는 꼭 구시가지에 있는 호텔에 묵으면서 샤워를 하고 개운한 몸으로 깨끗한 옷을 입고 이 거리를 걸어야지. 점심 먹고 한낮에는 해변에서 수영을 한 후 젤라또를 먹으면서 느긋하게 호텔로 돌아오고.. 샤워를 한 뒤에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으로 저녁을 먹으러 나가야지. 돌아와서는 샤워를 또 하고 개운한 몸으로 술을 한잔.. 아아 샤워가 하고 싶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드디어 영화 <시네마천국>의 배경이 된 해변에 도착했다. 영화에서 스크린을 걸고 야외상영을 했던 장소에 발을 딛고 서서 해변 풍경을 바라봤다. 색색깔 파라솔을 펼치고 아름다운 해변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 바람 한 점 없이 무더워 수영하기 정말 좋은 날이었다. 하지만 시간도 없고 캠핑카를 세워둔 곳에서 이곳 해변까지 거리가 멀어 파라솔이며 비치타올을 가져올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애초에 수영을 포기했던 우리는 그저 그들을 부럽게 바라볼 수 있을 뿐이었다. 어차피 수영을 하고 몸을 말리고 할 시간도 없었으면서 수영복을 입고 올 걸 그랬다고 한탄하다 그곳을 떠났다. 이곳의 주차장은 도저히 잘 만한 곳이 못 되기에 늦지 않게 출발해서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잘 만한 곳을 찾아가야 한다. 이것이 캠핑카 여행의 현실.



  돌아오는 길, 무더운 날씨에 걸어다니느라 기진맥진했지만 바에 앉아 한잔할 여유는 없었던 우리 눈에 마침 차가운 병맥주를 파는 가게가 들어왔다. 한 병에 2유로,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했다. 송글송글 물이 맺힌 시칠리아 지역 맥주를 한 병씩 골라들고 마시며 거리를 걸었다. 차가운 맥주를 한 모금씩 넘기자 몸 속에서부터 끓는 것 같았던 열기가 한결 식었다. 그 힘으로 차가 있는 주차장까지 걸어갔다.


시칠리아 지역 맥주들. 오른쪽 ‘메시나’는 지금은 다른 지역 마트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지친 몸으로 캠핑카에 도착했지만 그늘 한 점 없는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차 안의 열기도 엄청났다. 우리가 체팔루의 구시가지에 머무른 것은 약 한 시간, 주차장에서 왔다 갔다 한 시간까지 포함해도 약 두 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그새 차는 용광로처럼 달궈져 있었다. 하지만 얼른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쉴 만한 곳을 찾아가야 했기에 서둘러 자리에 앉아 구글맵을 켰다. 아, 애증의 구글맵.. 낯선 곳을 여행할 때 구글맵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 것은 맞다. 문제는 우리가 캠핑카를 타고 있다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길 안내였다. 조금 더 빠른 경로라는 이유로 너무 좁거나 낮아 캠핑카로는 지나갈 수 없는 길로 종종 우리를 이끌곤 했는데 그동안은 그래도 어찌저찌 되돌아 나올 수 있어서 큰 문제가 되진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리를 정말이지 큰 곤경에 처하게 하고 말았다.


  주차장에서 나온 우리는 복잡하게 연결된 좁고 구불구불한 도로를 구글맵의 안내를 따라 가고 있었다. 이런 길 끝에 마트가 있다고? 싶긴 했지만 구글맵을 믿고 가고 있었는데 코너를 도는 순간 바로 앞에 나온 길로 가라는 지시에 좁은 내리막길로 들어섰고, 곧바로 잘못된 안내였음을 알았다. 급경사의 짧은 내리막길 오른쪽으로는 차들이 세워져 있는 작은 주차장과 가건물이, 왼쪽으로는 주택 몇 채가 나란히 서 있고 길 끝에는 비포장 공터가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는 이미 내리막길로 들어선 상태였다. 우리 차는 후진으로 오르막길을 오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데다 그 지점이 메인 도로가 급격히 꺾이는 직후에 위치해 있어서 미적거리다가는 큰 사고가 날 것이 분명했다. 길이 너무 좁아 보여 불안하긴 했지만 내리막길 중간에 있는 작은 주차장에는 이미 차가 많아 어쩔 수 없이 내리막길을 따라 완전히 내려가야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내려오긴 했지만 앞으로 더 내려가기에는 길이 너무 좁았다. 공터로 나가야 차를 돌릴 수 있을 텐데 진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왼쪽으로는 가정집의 나무울타리가, 오른쪽으로는 전신주와 벽이 있었다. 그 둘을 건드리지 않고 지나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뒤로 되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해 진퇴양난인 상황.. 어떻게든 방법을 찾고자 갖은 애를 써 봤지만 절망만 깊어질 뿐이었다.

 

  결국 남편이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다며 앞으로 어떻게든 뚫고 가려고 했다. 그 바람에 전신주에 고정돼 있던 플라스틱 박스가 차에 밀려 뒤틀어지기 시작했다. 이게 변압기라면 정말 큰일 날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라도 전신주가 못 견디고 쓰러질지도 몰랐다. 나는 소리를 질러 남편을 멈췄다. 다행히 전신주는 무사했지만 차는 이제 완전히 꽉 끼었고 앞으로 1cm만 전진해도 전신주를, 최소 변압기를 부셔 버릴 참이었다.

 

  우리 캠핑카 여행의 가장 큰 고비가 찾아왔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게다가 옆은 가정집이고 앞은 공터주차장이어서 뒤에서 다른 차가 오거나 주차장에서 나오는 차가 곧 생길 터였다. 심장이 쿵쿵 뛰고 머리로 피가 몰려 두통이 왔다. 이제 방법이 없다.

 

  그때 바로 왼쪽 집에서 다부진 체격의 아저씨  분이 나오셨다. 우리 차의 엔진 소음이 워낙 크고 전신주를 부술 뻔했을  내가 내지른 소리가 컸으니 집에 계셨다면 모를  없긴 했다. 아무래도 집에서 지켜보다 못해 나오신 듯했다. 굳은 표정으로 다가오셔서 화를 내실  알고 순간 긴장했는데, 정작 아저씨는 별말 없이 다가와서 덤덤하게  양쪽을 살펴보시는 거였다. 짜증 한마디, 잔소리 한마디 없이. 그리곤 뒤로 살짝 후진한  조금  왼쪽으로 치우쳐 진입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왼쪽은 이미 아저씨네 나무 울타리에 최대한 붙어 있는데.. 우리가 망설이자 아저씨는 나무가 망가져도 되니 왼쪽으로  붙으라고 하셨다. 세상에.


  남편은 아저씨의 지시대로 조금 후진한 후 왼쪽으로 차를 더 붙이며 전진했다. 공들여 가꾼 사이프러스 나무의 가지들이 우지끈 우지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잔뜩 긴장한 우리가 아저씨의 눈치를 살폈지만 아저씨는 무덤덤한 얼굴로 계속 진입하라며 손짓하셨다. 그렇게 우리는 그 좁은 구간을 통과해 넓은 공터에 진입할 수 있었다. 세상에, 지옥 문턱에서 살아돌아온 것 같았다.


  아저씨께 감사 인사를 거듭하고 차를 돌려 그곳을 빠져나오면서 우리는 방금 전 일의 여파로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우리의 여행이 어떻게 됐을지. 우리는 분명 그 구간을 통과해 보려고 애쓰다 결국 그 동네 전기를 다 끊어 먹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뒷감당이 우리의 여행을 끝장냈을 테니 생각할수록 아찔하다. 시칠리아 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마자 파국을 맞을 뻔한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캠핑카를 타고 집 앞을 막아 버린 생면부지의 여행자들에게 잔소리 한마디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필요한 도움을 주셨던 그 분의 친절을 다시금 느낀다. 이후의 여행이 그 친절에 빚을 지고 있다는 것도. 언젠가 체팔루에 다시 가게 된다면, 그 집을 찾아가 아저씨 덕분에 이어갈 수 있었던 우리의 여행 이야기를 꼭 들려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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