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괜찮은 죽음 Jul 11. 2024

중견교사는 달인이 되었나?

소란한글방_성취에 대하여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그램에는 어떠한 일을 꾸준히 계속해나가며 한 영역에서 범접할 수 없는 수준에 오른 사람들이 출연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는 숙련된 기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무게를 맞히기도 하고 빠른 스피드로 손을 놀리기도 한다. 어떠한 분야든 달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존재했다. 


 올해로 교사가 된 지 21년째. 꾸준히 가르치는 일을 계속해왔지만 내 모습을 요렇게 저렇게 보아도 달인이라고 불릴 말한 어떠한 기능이 있거나 전문적인 수준의 해박한 지식은 나에게 없다.      

누가 나에게 교사로서 산지 스무 해가 지났으니 어떠한 면에서 뛰어나게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어쩌면 나 역시도 고개를 갸웃하게 될지도 모른다. 


수많은 아이들을 만났으니 이제 어떤 아이를 만나도 한눈에 척 특성을 파악하고 그 아이의 수준에 맞게 교육을 시킬 수 있을까? 

아니다. 어떠한 아이를 만나도, 심지어 같은 학년의 아이라 할지라도 매년 아이들의 모습은 다르다. 

어쩌면 오늘의 그 아이는 어제의 그 아이가 아닐지도 모른다. 

숱하게 학부모 상담을 했으니 이제 학부모가 원하는 것쯤은 손쉽게 이해하고 들어줄 수 있을까? 

아니다. 나는 아직도 학부모와의 대화 속 단절된 그 시간이 어색하고 난감하다. 

다양한 교육방법에 통달해서 수려하고 쌈빡하게 수업을 진행할 수 있을까? 

아니다. 나의 그날의 아이들의 컨디션과 이해도에 따라 수업은 산으로 올라가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제 갓 교탁을 밟는 저 교사와 늙다리 중견교사인 나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아이들을 이해하는 마음쯤은 내가 더 넓지 않을까? 

진짜 중요한 배움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분별력은 내가 더 깊지 않을까? 

그동안 쌓인 실수와 실패를 바탕으로 조금 더 매끄러운 수업목표에 도달하는 확률은 내가 더 많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내가 이룬 것들이란 하나도 눈에 보이는 것들이 없다. 

객관적인 기준을 갖고 정량적 결과를 확인해 볼 수 있다면, 예를 들어 내가 가르친 아이들이 서울대에 얼마나 합격했는지와 같은 눈에 보이는 지표가 있다면 20년 세월에 대한 자부심이 있을 텐데.      


우리는 한 권의 책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눈다. 

상추와 오이를 길러내고 나누어 먹는다. 

아침이면 그날의 기분을 물으며 하루를 밝힌다. 

나른한 오후시간에는 진도를 후딱 해치우고 보드게임을 함께 한다. 

따뜻한 봄 햇살을 맞으며 시를 쓰러 교정에 나간다.      


내가 교실에서 성취하는 것들이란 고작 그런 것이다. 

매주 보물상자에 담긴 아이들의 글에 꼼꼼하게 답글을 적어주며 응원해 준 것.

친구와 싸운 뒤의 속상함을 들어주고 그 마음에 응어리지지 않게 해 준 것.

끙끙대던 수학 문제 하나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축하해 준 것.      


내가 성취한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존재함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나뭇잎 살랑 흔들릴 때 바람이 부는구나를 느끼듯, 

스무 해, 교사로서의 내 결실은 바람처럼 온다.      

작가의 이전글 모든 존재는 경이로 향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