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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연 Feb 12. 2024

루틴과 매뉴얼

신뢰회복을 통한 비난문화(blame culture) 극복 

연초부터 몇 해 전 발생한 자연재해와 사건사고로 인한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이 연일 언론에 보도되었다. 실무자의 경우 과실치사상 혐의로 기소, 한 공직자는 업무상 주의의무 소홀로 재판에 넘겨졌다. 보도의 포커스는 주로 그들이 당시 충분히 취할 수 있었던 조치를 제때 다하지 않았던 정황에 맞춰져 있어 보는 이들로 하여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지금 여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사고의 인과관계를 파악함에 있어 조직문화는 크게 ‘비난문화(blame culture)’와 ‘공정문화(just culture)’ 두 부류로 나뉜다. 사고가 일어났을 때 비난문화는 ‘누구(“Who is to blame?”)’에, 공정문화는 ‘무엇(“What [of the system] went wrong?”)’에 각각 무게를 둔다. 다시 말해, 사고의 원인을 인간의 오류와 구조적 결함 둘 중 어디에서 주로 찾느냐다. 물론 현실 문화는 이 양극단 사이 어디엔가 위치해 있다. 따라서 모든 사고를 오로지 사람 혹은 체제의 탓으로만 귀속시키는 경우는 드물다. 그럼에도 독자는 한국사회가 유독 비난문화적 성격을 더 강하게 보여주고 있음에 공감할 것이다.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과거 한국에서 발생한 여러 재난과 재해, 사건과 사고의 끝에는 거의 공식처럼 ‘누군가’가 있어왔음을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난문화의 사건 스토리는 비현실적이리만큼 쉽고 깔끔하다. 어떤 사건이든, 거기에 피해자가 있고 그에 직간접적 책임이 있는 가해자가 등장한다. 우리가 어릴 때 읽던 동화와 유사한 이분법적 구조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머릿속에 더 깊이 박힌다. 미디어 역시 악당이 특정될 때 사건을 인과관계로 서술하거나 사회적 카타르시스로 플롯을 마무리하는 작업이 수월해진다. 자칫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시스템 등 ‘무엇’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적하는 것보다 누군가를 지목하고 그/녀에게 대중의 감정을 분출시킬 때 정의가 실현되고 있음을 우리는 더 생생히 체감한다. 이제는 익숙해진 우리 일상의 단편이다. 괴로운 일이지만, 이러한 패턴의 반복이 말해주는 고약한 한국문화의 특징을 살펴보자.


다소 오래되긴 했지만 2013년 세계인구보고서(World Population Review)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한국의 인종다양성 지수(EFI, Ethnic Fractionalization Index)는 3.92%로 당시 집계가 가능했던 188개국 중 북한(0.2%)과 일본(1.19%)에 이어 186위를 기록했다. 이 수치는 한국에서 무작위로 두 사람을 골랐을 때 둘의 인종이 서로 다를 확률이 채 4%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반대로 풀이하자면, 무작위로 추출한 두 사람 모두 ‘한민족’ 일 확률이 96%에 이를 정도로 인종적 동질성이 높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비난문화적 성격이 짙은 현실은 우리가 서로를 다르게 인식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타인과 자신의 공과 과를 평가함에 있어 이중잣대를 사용하는 편향성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일터에서 우리의 일상을 떠올려보자. 휴식시간 이외에 밖에서 동료들과 수다를 떨기도 하고, 어제 마감이었던 공문을 보내지 않아 독촉을 받기도 한다. 눈에 바로 띄는 자잘한 실수들은 곧바로 잡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은 때로 몇 주 혹은 몇 달 후에야 발견되어 골칫거리가 되기도 한다. 이런 사사로운 일탈이나 자잘한 실수에도 우리의 일상은 잘 돌아간다. 나뿐 아니라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그렇다. 사고가 터지기 전까지는.


한 용의자가 범죄사건에 연루되어 수사관에게 조사를 받고 있다. 용의자가 진범이라 가정했을 때 그/녀가 자백할 확률과 그/녀가 자백을 했다고 가정했을 때 그/녀가 진범일 확률은 매우 다르다. 두 확률 모두 같은 두 개의 사건에 관한 것이지만 둘 중 무엇을 전제로 했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발생한다. 전자가 약 50%라면 후자는 거의 100%에 가까워진다. 조건부 확률의 차이는 사고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사고가 일어나기 전, 평상시 관행대로 했던 일련의 일들이 사고로 이어질 수 있음을 예측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사고가 일어난 후 돌이켜보면 동일한 업무수행 과정 하나하나가 나를 차곡차곡 사고로 이끄는 단단한 디딤돌이었음이 뻔히 보인다. 무관했던 낱낱의 우연한 사건들이 드디어 퍼즐조각처럼 착착 맞춰져 필연이 되고, 그렇게 재구성된 당시의 환경이 거의 백 퍼센트의 확률로 사고를 부르고 있었음에도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정의(justice)는 항상 사후에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때는 몰랐던 것들’에 대한 학습과 사건의 재구성을 마친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당시 우리의 판단과 행동을 평가하게 된다. 당연한 일이다. 이미 알게 된 것을 모르던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문제는 우리의 일상을 이상(ideal)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루틴을 따랐지만, 정의는 항상 매뉴얼을 들이댄다. 어느 문화든 루틴과 매뉴얼 사이에 어느 정도의 이격이 존재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 너비는 문화마다 다르다. 그 간극이 클수록 타인에 대한 비난도 쉬워지게 마련이며 어느새 우리 주위에는 범법자가 늘어간다. 얼마 전 중대재해처벌법의 50인 미만 영세사업장 적용이 입법 예고되면서 "83만이 넘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이 한순간에 예비 범법자로 전락했다"며 호소하던 업계 대표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Wolfgang Stiller. 출처: https://www.pinterest.com/pin/412712753360943687/

비난과 질책이 응당 필요한 때가 있다. 악당이 있다면 그/녀를 처벌하는 것 역시 정의실현의 필요조건이다. 하지만 모든 사고와 재해는 필시 인재(人災)이며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전제가 짙게 깔릴수록 우리 사회에는 증거인멸과 사건축소, 책임회피, 불신과 감시, 빌런의 생산, 인민재판이 계속될 뿐이다. 문화학자들이 지적하는 비난문화에서 가장 흔히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한국의 제도와 시민의식은 과거 어느 때보다 성숙하다. 하지만 인간도, 인간이 만들어낸 시스템도 완벽할 수는 없다.


공정문화는 제도로써 미국연방항공청(FAA)에서 처음 시도되었으며, 2015년 당시 잇따른 항공사고에 대한 대책의 일환으로 한국 항공업계에서도 도입을 고려하던 제도다. 실무자들의 자율적 보고를 유도하여 사고를 예방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이것이 오히려 사고 시 실무자 처벌의 빌미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고, 결국 현실화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공정문화가 지향하는 가치와 취지만큼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인적처벌을 통해 집단과 시스템의 정상성(正常性)을 입증하는 비난문화와 달리, 공정문화는 사고를 개인 책임자의 징벌이 아닌 체제개선의 기회로 본다. 이 두 문화의 궁극적 차이는 타인에 대한 신뢰의 크기다. 비난문화는 그 정의상 타인에 대한 믿음의 부재를 전제한다. 사고 뒤에는 반드시 ‘직무태만’, ‘근무지 이탈’, ‘전문성 결여’와 같은 수식어가 어울리는 누군가가 있다. 그/녀의 업무행동을 준엄한 매뉴얼의 기준으로 평가할 때 비난은 더 거세진다. 공정문화가 체제결함에 무게를 둘 수 있는 것은 실무자에 대한 현실적인 수준에서의 신뢰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사고 당시 그/녀가 매뉴얼처럼 완벽 대응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주어진 상황에서 가능한 최선을 다했을 것(humanly possible)이라는 최소한의 믿음말이다. 나 스스로를 믿는 만큼의.


나이와 함께 늘어나는 것들 중 괴로운 것 하나가 후회다. 기억의 대부분은 후회의 꼬리표를 달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는 사건 전과 후의 정보량의 차이에서 오는 가치중립적인 현상일 뿐이다. 사건 후에 새로 알거나 깨닫게 된 것을 기준으로 그전에 내린 자신의 판단을 심판하는 것은 언뜻 자기비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나친 완벽주의나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의 발로일 확률이 더 높다. 삶에 대한 태도가 성숙할수록 우리는 후회보다 실수를 통해 새로 얻게 된 지혜에 집중하고 역경을 견뎌낸 자신의 추운 어깨를 다독여 주어야 한다고 배운다. 최근 재해나 사고에 대한 미흡한 대응으로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된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 우리가 타인을 단죄하는 기준이 자신을 평가하는 그것에 비해 다소 엄격한 것은 아닌지, 그로 인해 우리 사회의 에너지가 불필요한 일에 소모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오늘 우리의 루틴이 매뉴얼에 얼마나 근접한 것이었는지 차분히 돌아보았으면 한다.


데이터로 세상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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