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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미 Jan 30. 2023

시그네는 왜 최악이 되어야만 했는가.

<해시태그 시그네>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에 관하여.

영화 <해시태그 시그네>는 남자친구를 포함한 주변인으로부터 관심을 받기 위해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다 결국 최악의 선택까지 하게 되는 여자 '시그네'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 제목의 '해시태그'를 보고 시그네가 관심을 받기 위해 하는 행동들을 SNS 상에서 '좋아요'를 받기 위해 말과 행동들을 과장하는 현대인들과 연결 지을 수도 있다. 실제로 영화 내에서 시그네가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기 위해 일부러 '더 불쌍하게' 사진을 찍어 올리려고 하는 장면 등을 통해 SNS 속 '관종'(관심 종자의 줄임말로, 관심을 얻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신조어)을 비판하는 지점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원제가 <Sick of myself>라는 점을 생각하면, 왜 사람들이 관심을 받기 위해 병들고, 최악이 되어야 했는가에 집중하는 영화라 볼 수 있다. 즉, 이 영화는 관종이 된 개인을 비판하는 것보단 관종이 되어야만 하는 풍조를 만든 현대 사회 비판에 방점을 찍는다.

시그네는 관심을 받기 위해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다고 하거나, 개에 물린 한 여성을 도와주고 사실 자신이 물린 것 같다는 등의 거짓말들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거짓말들은 남자친구와 주변인들로부터의 관심을 이끄는 데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일 뿐, 당연히 다시금 원상태로 돌아가게 되는 것을 못 견딘 시그네는 결국 불법 약물을 과다 복용하여 치명적인 피부병에 걸리는 방법을 택한다. 사실상 불치병에 걸렸기에 오랫동안 남자친구, 가족, 주변인들에게 관심을 받게 되고 더 나아가 불특정 다수에게로부터 수많은 관심을 받게 된다. 피부병에 걸린 뒤 심리 치료를 위해 참석한 자조 모임에서도 자신이 어떤 부분에서 불쌍한 지 말할 때, 그것을 듣던 자조 모임 일원이 자신이 더 아프고 힘들다고 말한다. 자조 모임에서 "내가 제일 불행하다"고 말하는 것과 유사한 행태를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종종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의도하지 않더라도 주변인들과 대화를 할 때 자신이 제일 불쌍하고 힘들다고 과시하게 되곤 한다. (혹은 그러한 사람들을 자주 목격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아름다운 것에 이끌리기도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 정반대로 고통스럽고 끔찍한 것에도 관심을 두게 된다. 그러니 타인의 힘든 일에 보다 더 관심을 가지게 되고 잘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자꾸 불쌍한 부분을 어필한다. 이러한 심리적인 것을 활용한 대표적인 사례가 '신파 영화'로 볼 수 있다. 신파 영화의 정확한 뜻은 '새롭게 나타난 영화'이지만 당시에 새롭게 나타난 영화들이 슬프거나 감동적인 것을 보여주면서 관객으로부터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구조를 지녔기 때문에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신파 영화'는 주인공의 고생길을 과도하게 보여주거나 그 고생을 이겨내는 것을 보여주며 슬픔과 감동의 정서를 극적으로 자극하는 영화들이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신파적 요소에 싫증을 내고 있는 추세지만, 여전히 이러한 영화가 흥행 요소로 자리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과장된 고통을 전시하는 것이 결국 타인의 관심을 이끄는 데에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영화에서는 '시그네'의 극단적인 관종 행위를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시그네의 남자친구 '토마스' 역시 타인의 관심을 받기 위해 꽤나 노력하고 있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여자친구가 견과류 알레르기 꾀병을 부리며 주변인의 관심을 받을 때 경쟁적(?)으로 갑자기 자신의 전시 얘기를 하면서 관심을 다시 자신에게로 유도한다. 또한 애초에 토마스의 직업이 설치 미술을 하는 '예술가'이기 때문에 타인의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이기도 하다. 토마스는 시중의 공산품을 훔쳐와서 전시하는데, 엄연한 절도 행위임에도 예술 행위로 승화시키고 공산품을 예술품으로 만든다. 토마스가 하는 예술, 즉 토마스가 타인으로부터 관심을 받는 행위의 메커니즘은 시그네와 유사하다. 개에 물린 한 여성을 도와줬을 때 그 여성의 피가 시그네의 옷에도 묻은 것을 자신의 피인 것처럼 활용하거나, 다른 사람이 약물 부작용으로 인터넷에서 관심을 받고 있는 것에서 착안해 자신도 불법 약물을 복용하는 것 모두 타인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하나의 구조다.

이러한 시그네의 관종행위, 토마스가 '예술가'로서 설치 미술을 하는 방법, 그리고 타인의 고통을 전시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이끄는 신파영화의 구조까지 연결하면, <해시태그 시그네>는 '불행 포르노'를 생산하고 또 소비하는 현대 사회에 관한 영화다. 영화에서 시그네가 약물 부작용 피해를 겪고 있는 사람의 글과 사진을 보다가 토마스가 다가왔을 때 급히 노트북을 덮자 토마스가 '포르노'를 봤냐며 물어보는 장면이 있다. 타인의 고통 혹은 불행을 보고 즐기는 것이 '포르노'를 보는 것처럼 사회적으로는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자극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경우가 종종 존재하며 이러한 불행 포르노를 활용하는 것이 현대 사회에서 보편적인 예술의 한 형태가 되었다.

영화의 후반부에 가면 피부병에 걸린 시그네를 광고 모델로 세워 외적인 아름다움만을 추구하지 않고 사람 본연의 모습을 존중한다는 것을 어필하는 광고 에이전시가 등장한다. 이 에이전시는 시그네와 함께 팔 한쪽에 장애가 있는 여성도 모델로 기용하고, 시각 장애인을 회사 직원으로 고용했다. 언뜻 보기에 이 회사는 개방적이고 또 진보적이다. 그리고 그런 점을 개성으로 살려 마케팅을 하고 있다. 그러나, 마케팅 담당자는 사물이 원래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각 장애인을 배려하지 못하고 '몰랐다'고 대충 얼버무리거나, 증상이 악화되어 시그네가 결국 발작을 일으키는 사고가 발생했을 때도 '나는 잘못이 없다'며 무책임한 태도를 취한다. 누군가의 불편함이나 아픔 그리고 장애에 진심으로 관심을 다했던 것이 아니라, 마케팅의 일부분으로써 자사의 긍정적인 이미지 형성에만 활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대중들이 영화 속 마케팅 담당자처럼, 그런 타인의 고통이나 장애를 포르노적으로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해시태그 시그네>는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기 위해 일종의 '발악'을 하는 시그네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지만 그러한 시그네의 모습을 희화화하거나 풍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가 아니다. 낯설지 않은, 어쩌면 내 모습과도 유사해 보이는 시그네가 점점 최악을 택하면서 'Sick of myself'가 되어가는 상황을 통해 영화는 현대 사회의 '병든 관심'이 야기할 치명적인 결과를 경고한다. 시그네의 외로움은 어디서 왔는가, 시그네는 왜 최악이 되어야만 했는가. 자조 모임에서마저도 거짓말을 하며 자신의 불행을 과장해야만 자존감을 채울 수 있었던 시그네가 주변인의 관심을 받지 않은 채 홀로 바닥에 누워 자신의 삶이 좋다고 읊조리는 마지막 장면을 보고 골똘히 생각해 본다. 우리의 외로움은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왜 최악이 되려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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