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esterday Feb 10. 2023

 두 번째, 되짚어보기.

아직은 되짚어볼 게 너무도 많다.

첫 글을 쓰고 난 뒤에 내가 고민하게 된 게 하나 있다. 아버지의 사고 관련 얘기를 계속 쓸까, 아니면 우리 가족 넷에 관한 옛날 얘기를 쓸까. 그러다 문득 쓸 얘기가 생각났다. 오늘은 아버지를 면회했던 날에 대해 적어보고자 한다.


 난 스스로가 알던 아버지가 아닌 모습을 보기 두려웠던 탓에 사고가 나고 몇 주 뒤에야 면회를 가기로 마음먹었다. 정말 집 밖을 나가기 직전까지 고민했던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망치기 싫은 마음과, 아버지를 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힘껏 충돌했다. 그러나 결국엔 결과가 어떻게 되더라도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어머니와 함께 그 추운 바깥으로 나섰다. 이른 아침에 나가 버스를 타니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던 게 기억난다. 사람들은 열심히 하루를 살기 위해 버스를 탔지만, 난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버스에 몸을 맡겼다. 아버지를 볼 수 있다는 약간의 희망과 그로 인한 불안 때문에 하루종일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학병원에 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코로나 검사를 위해 접수하는 일이었다. 어머니가 옆에서 코로나 검사 비용이 벌써 올랐다고 하는 말씀을 하셨다. 3000원이 올랐다고 했나, 또는 300원? 어머니는 아버지가 대학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하는 동안 면회를 많이 하셨었다. 오빠를 데리고도, 아버지의 또 다른 가족들을 데리고도. 그래서 코로나 검사 비용이 오른 것도 금방 눈치채실 수 있던 거겠지. 만약 지금 코로나가 없었다면 더 자유롭게 아버지를 보러 갈 수 있었겠지만 아직 종식이 되지 않은 까닭에 여러 제약이 따른다. 더군다나 중환자실에 있어야 할 환자라면 더욱 그런 바이러스를 조심해야 하지 않은가.


 면회 시간인 11시까지 기다리고, 중환자실로 통하는 통로 앞에서 비닐장갑과 비닐 가운까지 입고 나서야 어머니와 나는 중환자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버지가 누워있는 병상에 도착하자 나는 아버지를 보았고 동시에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제대로 씻지 못한 게 분명한 모습이지만 딱 하나 의아했던 건 아버지의 수염이었다. 난 하루만 면도하지 않아도 까끌한 아버지의 수염을 잘 알고 있었다. 평소에 면도하지 않은 날은 그걸로 장난을 많이 쳤었는데, 가보니 깔끔하게 면도되어 있었다. 어머니께 여쭤보니 간호사가 해준 거거나, 아버지의 가족인 친척들이 해준 것 같다고 했다. 어느 쪽이든 참 대단한 정성이라고 생각했다. 간호사 분이 해주신 거라면 일이 참 힘들겠구나 싶었고 친척들이 면도해 준 거라면 굳이? 

 

아무튼 그런 생각은 제쳐두고 아버지를 바라보니 여기까지 온 수많은 시간동안 하고 싶었던 얘기들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갈색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계속해서 떠돌았다. 나는 그걸 보고 하나 깨달은 게 있다. 우리가 사람을 인식하는 데에 제일 큰 작용을 하는 건 눈이라는 사실이다. 난 그 눈에서 이질감을 느끼며 어딜 보고 있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앎에도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 어딜 보는 걸까?" 그 물음에 어머니가 뭐라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한 건 긍정해주지는 못했다는 것인데, 솔직히 그럴 정신이 있으셨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있으셨다 한들 불행하게도 나는 어머니가 쉽게 이해해주지 못할 성격을 가졌다. 가족 중에 유일하게 나의 성격에 대해 타일러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웠던 사람이 바로 우리 아버지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른 가족들이 강압적으로 군다는 건 아니지만, 내가 가족들 머리로는 무언가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할 때마다 제일 먼저 웃어넘기는 사람이 아버지였다는 뜻이다.


나는 사람이 가장 마지막에 기능을 다하는 게 청각이라는 사실을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는 우리의 말을 전부 들을 수 있을지 궁금증이 생겼다. 아버지를 보기 전에는 막연하게나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를 보니 그럴 수 없을 것 같단 생각으로 바뀌었다. 바깥소리를 인식할 순 있어도 그게 무슨 소리인지 구별할 순 없을 거라고 나 혼자서 결론 냈다.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나는 병원 중환자실의 규정 때문에 맨손이 아닌 비닐장갑을 낀 채로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비닐장갑을 낀 채로 아버지의 손을 잡는 순간, 얼마나 슬펐는지 모르겠다. 비닐을 통해 전해져 오는 감촉은 아버지의 손과 닮아 있었다. 내가 평생 잡아왔던 아버지의 손이었다. 평소에는 맞잡아주던 손이 이번에는 맞잡지 못한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나는 그 손을 놓지 않으며 사랑한단 말도, 왜 그랬냐는 원망도 세상 밖에 꺼내지 못한 채 마지막의 작별 인사만 건네고 돌아왔다. 그것도 형편없이 울면서. 어머니는 계속 우는 내게 울지 말라는 소리만 반복했다. 나도 여기서 우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울음이 터져 나오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20년도 안된 내 인생에서 제일 가까운 어른 중 한 명, 내가 제일 사랑하는 어른 중 한 명이 의식 없이 누워있는 모습을 거의 한 달이 되어서야 마주했는데 울음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유독 눈물이 헤픈 사람 중 한 명인 나는 그 사람에게 어떻게 참을 수 있느냐고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넓은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유일하게 의식을 되찾지 못한 환자는 우리 아버지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해서인지 주변에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게 왠지 모르게 억울했다. 중환자실에 아이가 하나 입원해 있었는데, 그런 아이를 면회오는 건 다름 아닌 그 아이의 부모였던 게 기억난다. 아이가 좋아할 만한 풍선과 장난감 따위를 잔뜩 들고 기대감에 부푼 부모와, 반대로 아무 미동을 하지 않는 아버지를 보기 위해 온 나라니. 괜히 이 세상에 우리만 초상집인 기분이었다. 모두가 나을 희망을 갖고 중환자실에 자리하고 있을 터인데, 우리는 그렇지 못한다는 점 때문인가. 의사들은 우리 아버지가 꽤나 젊기 때문에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나와 오빠 또래의 부모들보다 확실히 젊었다. 아직 50줄도 되지 못한 아버지의 나이, 학생인 오빠와 내가 호강이랄 것도 맛보게 해 드릴 수 없는 나이에 식물인간이 된 건 비통했다. 어른들이 자기보다 나이 어린 애들에게 커서 효도하려면 늦는다는 말을 왜 하는지 깨달았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른이 되면 효도해야지'하고 미루다 아버지에게는 영영 할 수 없게 된 나로서는 더욱 그러했다. 아버지가 마냥 좋은 사람은 아니었겠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될 만한 죄를 지은 것도 아님을 아니까.


중요한 건 누가 얼마나 힘겹든지에 관계 없이 시간은 무자비하게, 또 힘차게 흘러가고, 여기서 무슨 신호를 기다리는 것처럼 멈춰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힘들수록 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굴고 힘들수록 더 열심히 살아야한다. 비록 나는 그걸 지금 실천하고 있지는 않지만, 지금부터 하면 되겠지.


 

작가의 이전글 고 1, 어쩌면 인생의 전환점이 된 연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