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적어 내리지 않던 날들의 나의 행적.
벌써 3월 달이 지나가고 4월 달을 맞이할 준비를 할 시간까지 왔다. 그동안 잘 지냈냐는 물음을 띄운다면, 내가 그것에 대한 답을 한다면... 잘 모르겠다. 겉으로는 그럭저럭 지냈다. 티를 낼 것도 없으니 당연한 거겠지. 그래서 뒤죽박죽이더라도 선명한 기억들을 적어보고자 한다.
1. 중간에 다시 갈 수 없을 줄 알았던 병문안을 한 번 더 갔었다. 아빠는 더 이상 아빠가 아니게 되었더라. 이렇게 표현해도 될까 싶으나 부패만 되지 않은 시체와 마찬가지였다. 아빠의 커다란 체격은 반년도 채 되지 않아 말라버렸고 내가 더 이상 한 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오죽하면 간호사 분께 내 아빠가 맞냐고 물어볼 뻔했겠는가.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는 건 아빠 피부에 있는 크고 작은 화상 흉터들 뿐이라, 요즈음 나는 그 사실을 떠올리고 계속해서 우울해지고 있다. 병상에 누워 있는, 깡마른 그 모습이 얼마나 끔찍했으면 병문안을 다녀온 다음 날에 나는 꿈을 꾸기까지 했다. 꿈도 별로 꾸지 않는 내가 말이다.
2. 거기서 아빠는 아주 멀쩡했다. 우리 가족이 비행기에 타 있었고, 아빠는 쩌렁쩌렁 큰 소리로 업무 전화를 받고 있다. 나는 그 전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나서 우리를 사랑하냐고 물으며 아빠의 팔을 감싸 안는다. 아빠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는 무언가 빠진 기분을 느끼다 이내 아빠에게 '아빠는 죽었지 않느냐'라고 물었는데, 아빠는 씁쓸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그렇다고 했다. 그러더니 아빠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엄마를 구하러 간다고 했다. 난 아빠에 대한 꿈을 꾸면 매번 초반에 사고 사실을 까맣게 잊고 행복해하다가 늘 중간에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게 되었다. 꿈에서도 나는 아빠가 저 모양 저 꼴이 된 걸 인식한다는 게 얼마나 우울한 일인지 모른다. 또 아빠의 목소리와 아빠의 모습을 잊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내 모습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잊지 않게 도와주는 내 휴대폰에는 작년 목포에 갔다가 찍은 영상 몇 개가 있다.
난 그 영상을 틀면 아빠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러던 중 '이걸 사람들에게도 공유하면 어떨까?' 싶어 함께 그 영상의 소리를 조금, 혹시 몰라 화면은 가린 채 들어보고자 해서 가져왔다.
작년 5월 달의 소리다. 우리 가족 넷 다 멀쩡했던, 아무 생각 없었던 이들의 소리였다. 이 영상의 소리를 들으면 우리가 얼마나 평범한 가족 상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난 내가 그나마 괜찮아졌다고 생각하고 지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여전히 아빠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눈물이 나고, 다른 사람들을 시기질투하고, 아빠의 흔적들을 보면 어딘가를 걸어가다가도 발걸음을 멈춘다. 나는 지금도 멀쩡했던 아빠가 보고 싶다.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는 이 감정이 버거울 때가 많다. 내 눈으로는 커다랗게 보였던 아빠가 이제는 병상에서 점점 말라가고, 그런 아빠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고, 내 친구들에게 이런 상황을 하소연할 수도 없는 그 사실 또한 버거울 수밖에 없다.
4. 이렇게 힘들 때마다 가끔씩 생각나는 문학 작품이나 영화의 문장이 존재하는데, 그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대사 중에는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 테니까!"
하는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의 희망찬 다짐이 존재한다. 나는 스칼렛의 당찬, 불굴의 의지를 내뿜는 그 특유의 땅을 사랑하는 아일랜드인의 성격을 좋아한다. 아이를 잃고 남편도 떠나갔음에도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그녀의 다짐이 너무 잘 드러나기 때문일까? 내 마음은 나도 잘 모르지만 아마도 그래서 좋아하는 듯하다. 어떻게 해서든 모든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가는 주인공의 모습이 매력적이게 느껴졌다. 나는 절대 그렇게 하지는 못할 테지만, 원래 문학과 영화는 약간의 대리 만족을 위해 존재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원래 문학과 영화를 좋아하던 나는 이번 일로 등장인물들의 심리가 잘 보이거나 유추하기 재밌는 것들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음을 달래기 위해 본 것들이 죄다 그런 종류였기 때문이다.
5. 다음에는 이런 우울한 얘기가 아니라 내 취향 문학과 영화 작품들에 대해 적어볼까도 생각하고 있는데, 마냥 이런 감정들만 글에 녹여낸다면 이곳은 내 감정 쓰레기통이나 다름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조용했던 나날의 날 괴롭혔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만나서 자신의 아픔에 대한 얘기만 한다면 상대방이 지치는 것처럼, 글도 마찬가지지 않을까.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는 이 글의 내 첫 문장을 뒷받침해 줄 글이 필요해졌다. 아픈 얘기만 꺼내서는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도 알고 있다.
그러니 다음번에는 꼭 마음 편한 얘기를 가져오겠노라 약속하겠다. 운이 좋으면 4월 달에, 나쁘면 5월 달. 그때까지 이 글을 읽는 모두가 마음 편히 지내시기를 액정 너머에서 기도하고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