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회사도 화면하단에 똥을 싸는 일을 하는구나"
누군가에게 필자의 직업과 회사에서 하는 일을 밝히면 몇 가지 고정적으로 따라오는 질문이 있다. 하나는 "네가 영어를 그렇게 잘해?"같은 번역 PM이라면 누구만 받아봤을 고전적인(?) 질문이다. 그런데 미디어 번역을 한다고 했을 때 근래 들어 자주 받게 된 질문이 있다. 그건 바로
"근데 요새 OTT 자막 왜 그 모양이야?"
...라는 것이다. 물론 질문자와 필자의 친분의 강도(?)에 따라 비례적으로 말이 더 거칠어지기도 한다. 친한 형에게 들었다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아래와 같다.
"너희 회사도 화면하단에 똥을 싸는 일을 하는구나"
사람들이 자막 번역에 대해서 불신을 가지게 된 계기가 여럿 있었는데, 대표적으로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효심이 갸륵했던(... 어머니), 그리고 염세적이었던(가망이 없어) 번역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디즈니 플러스 론칭 초기의 기사화까지 되어 비판받았던 번역 문제도 있었다. 물론 이런 굵직한 사건 외에도 모두들 각자 자막을 보며 의아했던 경험은 하나씩 있었을 것이다.
이 업계의 감수자 중에는 그런 자막을 보며 답답한 마음에 "내가 해도 저거보단..."이란 마음으로 업계로 들어온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필자가 번역 PM으로 일을 하면서도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많았는데, 대표적인 원인이라 짚어볼 문제들이 몇 가지 있었다. 본문에선 이에 대해 자세히 풀어볼까 한다.
매달 몇 백 시간 분량의 영상물 번역이 이뤄지는 업계에서는 그런 '센스'는 측정되고 관리되기 어려운 주관적 영역의 척도일 뿐이다.
이건 필자가 미디어 번역 업계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느낀 점이다. 대중은 황석희 번역가의 번역과 같이 '센스 있는' 번역, 그리고 원작에 대한 깊은 이해도를 갖춘 번역을 원한다. 하지만 매달 몇 백 시간 분량의 영상물 번역이 이뤄지는 업계에서는 그런 '센스'는 측정되고 관리되기 어려운 주관적 영역의 척도일 뿐이다.
실제로 고객사 측 감수자와 가장 첨예하게 얘기되는 부분은 '원작에 대한 깊은 이해도'나 번역의 '센스' 같은 것들이 아니다. 되려 '센스' 있는 번역을 하려고 했다가 번역문이 원문에서 너무 멀어져서 오역 판정이 나기 일쑤인 상황이다. 가장 이슈가 되는 부분은 OTT 사의 번역 및 자막 가이드 및 맞춤법 등 문제이다.
예컨대 FN(forced narrative: 음성자막이 아닌 화면상 나오는 문자 정보에 대한 자막)을 큰 따옴표 처리를 했는지, 작은따옴표 처리를 했는지, 국어원에서 논의된 가장 최신의 맞춤법, 외표법을 따랐는지 등 자막의 '형식적'인 부분들이다.
물론 OTT 본사나 번역 에이전시들이 번역의 내용적인 부분을 일부러 등한시하기 때문에 이런 경향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경향의 원인은 형식적 부분과 내용적 부분을 나눌 때, 체크가 쉬운 부분이 전자라는 데 있다.
형식적인 부분은 사실 번역문만 봐도 틀린 부분을 찾아내기란 어렵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 내용적인 부분은? 원문과 번역문을 대조해서 봐야 될뿐더러, 그 대사가 사용된 앞뒤 맥락까지 모두 파악이 되어야 정확한 오역 파악이 가능한 부분이다. 매월 수 백에서 수 천 편의 품질관리를 하는 OTT 본사나 이들의 1차 벤더사에서 '효율적인' 품질관리를 하겠다고 생각했다면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둘 지는 자명하다.
퇴근 이후나 주말에 당신은 없는 시간은 내서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들었다. 학업이든 업무든 할 일이 산적해 있는 상황에서 당신은 기꺼이 16부작 시리즈 정주행 열차를 타기로 작정했다. 이 정도 큰 결심(?)을 할 당신은 해당 작품의 연출진, 원작이나 전작, 출연진, 작품이 나오기까지의 히스토리 등에 대해 자세하게 알 가능성이 높다.
이번에는 해당 작품을 맡은 번역가의 방을 들여다보자. 마침 마감을 끝낸 번역가의 메일함에 메일이 도착한다. 자주 업무를 주던 번역 에이전시 PM의 발주메일이고 선호하는 시리즈물 번역 의뢰이다. 기뻐하는 마음도 잠시, 자신에게 의뢰한 분량이 시리즈 전체가 아니고 6~10화 구간이다. 게다가 평소보다 납기가 빠듯하다. 번역가는 최대한 인터넷에서 긁어모을 수 있는 정보를 모은 후 1~5화까지의 내용을 상상해가면 6화부터의 번역을 시작한다.
물론 위에서 대비시킨 장면이 현실의 모든 면을 반영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이렇게 무리하게 진행되는 프로젝트가 대부분인 것은 아니고, 만약 이렇게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번역 회사 입장에서도 번역가 선정 시 최대한 해당 시리즈에 견문이 있는 번역가를 섭외하려고 노력하고, 납기 문제로 시리즈 내 번역가가 나뉠 경우는 용어집 관리나 감수 과정상 일관성 문제가 없도록 수정하는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는다.
하지만 그것으로 부족한 자료조사 시간이나 맥락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일관성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며,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급행 진행 건도 현실에 반드시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만약 당신의 큰 결심의 대상이 이렇게 진행된 프로젝트라면? 자막을 보며 당신의 고개 각도가 옆으로 약 45도 정도 기울게 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드라마 시즌제 제작이 아직 일반적이지 않은 국내 상황과는 별개로 외국 드라마의 경우 많은 드라마들이 시즌제로 제작된다. 그런데 시즌6 정도 시리즈물을 그전 시즌을 전혀 모르는 번역가가 덜컥 맡아서 작업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본적으로 드라마 내에서 얘기되는 중요 개념들에 대해서 다른 용어로 번역할 가능성이 높고, 인물 간 존대를 쓰는지 여부나, 관계에 대한 미세한 뉘앙스 차이에 대해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번역할 가능성이 높다.
기본적으로 번역가는 OTT 본사와 직접 계약을 하든, OTT 사의 벤더사 혹은 하청업체와 계약을 하든 상관없이 마찬가지로 정규 내근직이 아니다. 번역작업 계약은 한 시리즈의 몇 편, 혹은 시즌 단위로 의뢰를 받고 해당 업무가 끝나면 이후 어떤 업무를 받고 안 받을지는 번역가 개인의 자율에 맡겨져 있다.
물론 번역업무를 하는 곳에서 미리 해당 번역가에게 번역일정을 공지하고 미리 작업을 확정하여 기존에 했던 시즌을 이어 번역할 수 있게 업무를 잘 짠다면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겠지만 여기엔 상당히 많은 장애물들이 존재한다.
첫째로 전 시즌을 맡아서 진행했던 OTT의 벤더사나 번역 에이전시가 반드시 다음 시즌을 맡아서 진행할 거라는 보장도 없으며 둘째는 동일한 업체에서 해당 작품을 진행한다고 하더라도 주어진 납기가 해당 번역가 스케줄과 맞지 않을 수 있다.
셋째는 번역 에이전시에서 번역 관련 데이터 관리를 소홀히 했다면 동일한 번역가가 작업을 하더라도 일관성 없는 번역이 나올 수도 있다. 시즌제 드라마는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2~3년까지 텀을 두고 제작될 수 있기 때문에 그전 작업이 번역가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있길 기대하는 것도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업계의 구조적인 문제점에 대해서 살펴봤다면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이다. 바로 업무 자체의 성격에 대한 얘기다.
45분물을 기준으로 한다면 약 600~1,000개의 자막을 작업하게 된다. 그럼 16부작 한 시즌을 맡아서 작업을 한다면 산술적으로 10,000~16,000개의 자막을 사람이 손수 작업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오류율이 0.1%의 숙련된 번역가가 작업을 한다고 생각해 보자.(이런 번역가가 있다면 지금 당장 hr@barunmc.com으로 CV를 보내라.)
적어도 한 시즌에 20개 미만의 실수가 생길 수 있다는 결과가 나온다.
물론 1차적으로 번역 에이전시의 감수가 이뤄지고 이후 벤더사, 본사 등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검토 작업이 이뤄져 이러한 오류들이 상당히 많이 걸러지긴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라 이게 100%가 나올 수는 없다. 하다못해 공장에서 기계가 하는 일에도 그 정도 불량이 나온다.
하지만 이건 공급자의 사정이다. 수요자인 당신이 소파에서 드라마를 보다가 자막에 오타가 걸린다면 이런 사정을 십분 이해하여 너그러운 마음으로 번역가와 감수자의 노고를 치하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