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막의 품질과 번역 에이전시의 역량
지금까지 자막 제작에 대한 절망 편이었다면, 이제부터는 희망 편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상기한 구조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상당 부분은 번역 에이전시의 역량에 따라 완전한 해결까지는 아니더라도 완화까지는 가능한 부분들이다.
업계에 있는 프로들이 과연 이런 문제를 눈 뜨고 지켜보고만 있었겠는가?
...뭐 좀 그런 부분도 없지 않아 있지만, 적어도 필자가 근무하는 바른번역미디어에서는 문제해결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첫째로 얘기할 것은 바로 번역가와 감수자들의 자부심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왜 처음부터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적인 측면이 작업 결과물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만약 번역가나 감수자가 '최소한'의 업무만 진행하려는 마음을 먹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되면 굳이 '안전하지 않은' '과감한' 번역을 하지 않으려 할 것이고(물론 원문에서 너무 벗어나면 오역이 될 수 있기에 이는 상당히 정교한 작업이기도 하다) 번역의 내용적 측면에 대한 고민은 갈수록 줄어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토양 위에서는 절대 센스 있고 재치 있는 번역이 나올 수가 없다.
때문에 좋은 번역이 나오기 위해서는 이런 자부심이 길러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첫째로 번역가와의 소통 관리를 아주 정교하게 해야하는 과제가 생긴다.
바른번역은 번역본 감수 이후 모든 수정내역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내용을 정리하고 각 수정라인별로 필요하면 수정이유를 상세히 기재하여 해당 번역가에게 제공한다. 단순히 수정내역만 보고 감수경향을 번역가가 오해하지 않도록 메일상 수정의 경향 및 차후 개선사항을 추가적으로 기재하여 번역가에게 전달하고, 이에 대해 문의가 오면 최대한 상세하여 답변을 드리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업무과정을 효율화하기 위해 감수 피드백 파일을 생성해주는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활용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번역가와 회사가 좀 더 긴밀하게 소통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면 번역가는 회사의 번역 지침 및 감수경향을 보다 정밀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를 토대로 번역가는 번역문을 써나가는 데 운신의 폭을 이전보다 넓힐 수 있는 것이다. 번역을 하는 데 있어 제출처의 감수경향이 모호하다면 번역가는 좀 더 안전하게 번역하는 걸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흔히들 세상은 예스맨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필자는 업무를 진행하는 데 있어 납기문제에 대해서는 꽤나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명하고 고객과 협의를 하는 편이다.
대부분의 OTT 시리즈물 번역의 경우 업무 볼륨이나 납기 등에 대해 협의를 하는 동안 해당 업무가 진행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 수 있다. 그래서 고객사에도 최대한 업무 진행 윤곽이 보일 때 미리 언질을 달라는 요청을 해놓는다. 그리고 혹시 후속 시즌이 들어오는 경우라면 미리 전 시즌을 진행했던 번역가에게 일정을 공유해놓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업무는 번역가와의 신뢰관계가 구축되어 있지 않으면 유지되기 어렵다. 업무협상 단계에서 해당 업무의 '존재'를 알았다고 해도, 해당 업무가 일정이 변경되거나 발주가 나기 전에 캔슬되는 일도 왕왕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럼 미리 스케쥴을 빼놓은 번역가는 그 시간만큼 손해를 보기 때문에 협조요청에 응하기가 부담스러워 진다. 때문에 번역 에이전시는 그럴 경우 해당 번역가에게 다른 업무를 배정해줄 수 있도록 '플랜B'까지 짜놓을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에는 매우 정교한 일정관리가 필요하다.바른번역은 사내 모든 프로젝트의 일정 및 투입 번역가, 진행 상태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ERP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때문에 다른 PM이 진행하는 건의 상세 내역도 한 화면 안에 진행상태를 바로 체크할 수 있어, 전사적(全社的)으로 업무 배정 및 변경을 유동적으로 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업무일정 변경으로 최대한 번역가의 일정 변경 손실이 발생하지 않도록 담당PM뿐만이 아닌 사내 모든 PM이 협조하여 업무를 조정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번역가와 구축한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고객사와 업무조정을 원활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서서 휴먼에러는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건 사실이다. 다만, '완전히' 막을 수 없다고 했지, 그래서 이 문제를 방치하는 게 답이란 말을 하진 않았다. 세상에 100%라는 것은 없기 때문에 문제가 아예 안생길 수는 없겠지만 문제를 최대한으로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이 문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첫째는 꼼꼼한 성격의 감수자들로만 감수진을 구성하면 된다. 그리고 두 번째는 감수진이 감수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첫 번째로 든 꼼꼼한 성격의 경우, 너무 당연한 말 같이 들리겠지만, 이를 엄격히 했을 때와 안했을 때 현장에서 오류율은 확연히 달라진다. 감수작업에 필요한 역량은 언어 실력이나 성실함 등 여러 측면이 존재하겠으나, 꼼꼼함은 훈련을 통해서 향상되기가 다소 어려운 조건에 속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바른번역의 감수자 선발 시스템은 매우 엄격하게 이뤄지고 있다. 1) 서류단계에서 관련 업계의 상당한 경험이나 외국어 실력 등을 철저하게 검토하고, 2) 역량기술서 및 감수, 맞춤법 테스트 등을 통해 감수자 업무에 적합한 역량 및 스킬을 보유하고 있는지 심도 있게 분석한다. 3) 또한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할애해 면접을 진행하면서, 업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나, 인적성, 소통능력까지 총체적으로 검토하여 적합한 사람을 선별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런 채용 절차를 통과했다면 각기 역량에 따라 기간이 다르겠지만 최소 2개월에서 4개월 정도 간의 업무 기본교육을 이수해야만 실제 업무에 투입되어 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업무 기본교육은 이론과 실습, 그리고 감수팀장의 직접적인 피드백을 통해서 매우 강도높게 이뤄진다.
물론 여기까지 읽었다면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상기한 채용과정을 뚫고 교육과정을 감내할 사람이 어디 흔한가, 이다. 맞는 얘기다. 그래서 바른번역은 업무가 아무리 폭주하고 인원 충원이 시급하더라도 채용에서 업무투입까지 최소 반 년 정도가 소요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인사 계획을 세운다. 모집 및 채용에 3~4개월, 교육진행에 3~4개월 정도를 예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지난한 과정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프로 번역가들의 번역문을 검토하여 수정하고, 실수를 탐지하여 오류율을 줄일 수 있는 능력을 얻게된다.
감수진의 주 업무는 감수다. 그리고 회사는 감수진이 주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 근데 이 당연한 명제가 제대로 지켜지는 경우를 찾아보기가 오히려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우선 감수 업무를 받고, 중간 확인을 하고, 완료 후 보고하는 데까지 소통과정이 잦고, 회사마다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팀 단위, 부서 단위, 사업부 단위 회의에 불려 다니기 일쑤다. 아울러 각종 업무보고나 감수 외의 업무가 할당되어 일이 진행되기도 한다. 아울러 자막 파일을 다루는 미디어 번역의 특성상, 회사에 기술적 역량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면, 각종 프로그램 사용법에서부터 다양한 확장자의 자막 파일 다루는 법, 고객사별 번역 시스템 활용법에 이르기까지 모두 감수진이 감당해야 할 수도 있다.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정작 감수진은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온전히 감수에 집중해서 일하는 시간이 얼마 없게 된다. 그리고 이는 바로 휴먼에러의 증가로 이어진다. 따라서 감수진의 능력을 십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단순히 1차적인 환경 조성, 예컨데 적절한 장비 제공, 파티션, 소음 제어, 온도 및 쾌적한 업무환경 유지 같은 부분 외에도 전반적인 인사제도, 업무방식 개선이 병행되어야 한다.
바른번역에서는 감수진의 집중력 훼손 방지를 위해 약간 독특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바로 가급적 말을 적게 걸되, 필요한 말이 있다면 최소한의 시간에 완료될 수 있도록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적절히 선택하는 방식이다.
첫째로 바른번역은 각자의 업무 진행 상황이 한 눈에 파악될 수 있도록 해주는 정교한 ERP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PM이 감수자가 무슨 작업을 하고 있는지 일일이 말을 걸어 확인하지 않더라도 해당 시스템상으로 확인하면 파악이 가능하다. 따라서 업무 배정, 진행상황 확인, 완료 확인에 일일이 말을 걸어 확인할 필요가 없다. 감수자가 자신의 업무상황을 해당 시스템에 간단히 업데이트해주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곧 감수자의 집중을 방해할만한 요소가 최소화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 간단한 사항은 메신저로 확인하고 좀 복잡한 문제의 경우는 구두로 소통하는 방식을 취한다. 단답이나 상황 확인 정도만 해주면 되는 소통은 간단히 메신저로 대답을 들으면 되고, 심지어 대답도 아이콘 등으로 간소화할 수 있다. 반대로 좀 복잡한 문제의 경우 문자로 말이 길어지면 되려 커뮤니케이션에 소요되는 시간 및 노력이 배로 증가하기 때문에 가급적 구두로 문제를 정리하고 필요 시 메일이나 메신저로 얘기나눴던 사항을 간단히 정리하는 게 효율적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쩔 수 없이 감수작업 외의 업무가 발생할 경우, 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감수 외 작업이 늘어날 수록 감수에 투여해야할 노력이 분산되고, 이는 곧 감수량의 축소 혹은 감수품질의 저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를 줄이면 감수자가 좀 더 자신의 주 업무에 집중도를 유지할 수 있어 휴먼에러를 감소시킬 수 있는 것이다.
바른번역의 경우, 텍스트 감수 외의 감수자의 업무는 주로 다양한 확장자의 자막 파일 변환이나 번역가에게 줄 피드백을 작성하는 일 등이 있다. 특히 감수 피드백 작성의 경우는 각 주요 수정부분에 대한 사유까지 기재하므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작업이다. 바른번역에서는 손이 많이 가는 변환 작업의 경우, 변환 프로그램 자체 개발을 통해 업무 로드를 최대한 줄이고, 감수 피드백 작성의 경우, 자막 간 비교 툴을 만들어 해당 업무에 들어가는 시간을 최소화시키고 있다.
이상, 자막 번역의 오류와 그 해결책에 대한 고민을 풀어봤다. 하지만 아무리 필터를 미세하게 만든다고 해도 초미세먼지는 유입이 될 수 있듯이, 이런 과정을 뚫고서도 타오르는 집념으로 OTT 화면에까지 안착을 성공한 자막오류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오류를 발견했다면 모니터에 손을 지긋이 가져다 대고 강력한 기운을 전달 받을 수 있도록 정신을 집중해보자. 초먼치킨 은신 만렙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오류에도 언제든 패션 마스크의 필터가 아니라 KF94 필터가 되는 번역회사가 되도록 노력하겠다.
모두들 건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