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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른번역미디어 Feb 17. 2023

AI 시대의 번역 (2)

-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계번역의 미래

그렇다면 질문을 한 번 바꿔보자. 기계번역 번역 시장에 혁명적 변화를 불러올 것인가, 기존 번역사들의 일자리를 뺏을 것인가, 번역 시장의 인력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인가, 같은 거창한 질문이 아니고 이런 질문은 어떤가.

기계번역은 ‘결국’ 시장에서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도태될 것인가?

위의 거창한 세 개의 질문에는 현재의 상황으로서는 확답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아래의 질문에는 확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대답은 ‘아니요’다. 이 의문문에는 ‘결국’이라는 부사가 붙었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네’라고 대답을 하기에는 지금의 흐름이 너무 거대하다.

몇 년 전 구글에서 신경망 번역이 발표된 이래로 기계번역 기술뿐만 아니라 그와 연계된 AI 기술들은 계속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왔다. 범용 번역기의 한계를 각 분야별 원문-번역문의 머신러닝을 통해 정확성을 상승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고, 최근에는 ChatGPT에서 자연어 처리 AI 기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기술의 발전 속도도 놀라울 정도다. 이런 변화가 십 년 단위의 변화가 아니라 불과 몇 년 사이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핵전쟁이나 지구 온난화로 큰 재해를 입어 상당한 퇴보가 진행되는 등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우리는 멀지 않은 미래에 기계번역에 의해 재편된 번역 시장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다만, 그 최종형태가 언제가 될지, 어떻게 될지의 구체적인 모습은 필자의 식견이 부족하여 제대로 그려보진 못할 것 같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떤 문제점을 극복해야 할지에 대한 부분, 그리고 어떤 장면이 중간중간 연출될지는 어느 정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1. 기계번역과 번역시장의 향방

기계번역이 번역시장에 확실한 파이를 차지하기 위해서 극복해야 하는 과제는 간단하다. 현재 범용으로 개발되어 있는 번역기를 각 분야별 전문 데이터로 학습시켜 전문 분야 문서라도 일정 품질 이상을 담보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어느 정도 표준적인 품질을 담보할 수 있게 된다면, 대고객 쪽으로도 표준적인 서비스를 제안할 수 있고, 번역가 쪽에도 표준적인 단가의 작업을 제안할 수 있게 되어 MTPE 프로젝트가 가진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인간이 수행하는 포스트 에디팅 과정이 극소화되는 방향으로 기계번역이 발전하긴 하겠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MPTE 시장이 확대되는 데에도 십 년 이상의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한다. 기술적인 부분이 먼저 치고 나가더라도 그게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MPTE 프로젝트 시장이 확대되어 감에 따른 번역시장의 변화는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존재할 것이다. 필자가 보기엔 여기엔 지나치게 암울한 전망과 지나치게 희망적인 전망이 공존하는 것 같다.


(1) 기계의 인간지배 시나리오(?)의 첫발로써의 기계번역

먼저 암울한 전망부터 살펴보자면, 기계번역이 인간 번역가의 일자리를 빼앗고 모든 공정을 자동화해서 소수의 사람들에게 부를 집중시킬 거라는 전망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근대에 방직기가 개발된 이래 고도의 기계화가 진행된 현재 시점까지 인구 대부분의 일자리가 없어진다거나 하는 극단적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게다가 기계번역이 인간을 ‘완전히’ 대체하는 데까지는 여전히 갈 길이 먼 상황이다. 

또한 이런 주장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은 기계의 도입으로 생산성이 높아져서 가격이 떨어지면 번역 수요 또한 증가할 거라는 점이다. 가격 때문에 의뢰하지 못했던 잠재수요가 시장에 나오면 번역 단가가 떨어지더라도 시장의 총매출은 유지되거나 오히려 높아질 수도 있는 것이다. 손 바느질로 옷을 만들어 입던 시절의 옷에 대한 수요량과 대량생산 체계 하에서의 옷에 대한 수요량, 그리고 전체 의류시장의 매출 수준은 비교할만한 수준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기계번역이 산업 내에 깊이 침투한다 해도 번역가들의 업무성격은 무척이나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들 대부분의 일자리를 뺏을 상황까지는 가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2) 머릿속에 꽃밭이면 상상할 수 있는 착한 기계번역

이의 대척점에는 낙관론도 존재한다. 기계번역이 도입되면서 인간의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킬 것이고, 번역가의 업무를 고도화시켜서 번역가의 수입이나 업무 여건 개선에 큰 기여를 할 거라는 의견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보자면 손바느질을 해서 옷을 만들어 팔던 장인보다 의류 공장 기계 엔지니어가 더 많은 수입을 얻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장인과 엔지니어는 완전히 다른 직군의 사람인 점을 짚어야 한다. 이 같은 낙관론이 사실이 되려면 지금의 번역업무와 미래의 번역업무가 어느 정도 유사성을 가지고 있을지에 대한 새로운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미래의 번역업무가 현재와 유사성이 짙어 현재의 인력이 그대로 미래의 고도화된 번역업무로 넘어올 수 있다면 이런 가정은 사실이 될 테지만 그게 아니라면, 산업군의 성장과는 별개로, 번역가의 입장에서는 기계에게 일자리를 빼앗기는 결론밖에 남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별개로 기술의 발달로 잉여수익이 생겼을 때 그걸 누가 차지하는지, 우리는 수많은 역사적 현장에서 봤듯이 그 결론을 알고 있다. 앞서 들은 예에서도 그렇고 방직기의 발명이 과연 방직공들이 부자가 되는 방향으로 기능했던가? 노동의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물론 해당 노동이 창출하는 부가가치에 영향도 있긴 하겠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해당 노동의 희소가치일 것이다. 그 희소가치가 있어야 노동자에게 협상력이 생기고 기술 혁신으로 창출되는 수익에 대해 요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번역가 개인으로서는 기술 혁신이 이뤄지고 있는 현 상황에서 그 희소가치를 제고할 수 있는 방향이 무엇 일지에 대한 고민에 좀 더 비중을 둬야 할 것이다.






2. 기계번역 시대의 번역 에이전시의 경쟁력

번역 에이전시가 다루는 기계번역의 비중이 늘어나면서 번역회사에 요구되는 역량의 성격도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는 충실하고 풍부한 고객과의 네트워크와 탄탄한 번역가 풀, 프로젝트 매니저 및 감수진 등 내부 직원들의 역량들이 성공의 중추가 되었다면 앞으로는 여기에 몇몇 요소들이 추가되지 않으면 번역시장에서 우위를 선점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1) 양질의 번역 데이터 선점

첫째로 양질의 번역 데이터를 선점하는 것이다. 범용 번역기의 품질을 상향시키려면 각 분야별 양질의 데이터로 다시 재학습을 시킨 번역엔진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작업이 선행되어야 비로소 표준적인 품질을 산출할 수 있는 기계번역을 진행할 수 있고, 그래야 MTPE 시스템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업력이 오래된 번역회사라면 상당히 방대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긴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엔진 학습을 위해 쓰이려면 여러 가지 가공과정을 거쳐야 한다. 당장에 pdf, hwp, docx, xlsx 등 다양한 포맷으로 이뤄진 데이터를 한 가지 포맷으로 변환해야 하며, 각 분야별로 데이터를 분류해야 하고, 원본-번역본을 문장별로 정렬하는 얼라인(Align) 작업까지 이뤄져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얼마나 빨리, 효율적으로 수행하여 양질의 머신번역 엔진을 학습시키는가가 향후 번역시장에서의 성공의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PE 작업자 풀 구축

둘째로 대규모의 PE 작업자 풀을 구축해야 한다. 앞서도 지적한 바 있듯이 기존 번역가들의 경우, MTPE 프로젝트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거나, 해당 일에 익숙치가 않아서 기존 번역 일과의 관계에서 PE 업무를 후순위로 놓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안정적인 MTPE 프로젝트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PE 작업에 경험이 있고 이에 호의적인 번역가 풀을 따로 선발하거나, 기존 번역가 풀에서도 어느 정도 분류를 해놓는 작업이 필수가 될 것이다. 그리고 MTPE 작업의 경우 각 프로젝트가 대규모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총 번역가 풀에서의 처리용량이 큰 번역 에이전시가 시장에서의 기회를 잡기 유리할 것이다.


(3) MTPE 프로세스 효율화

셋째로 MTPE 프로세스를 효율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계번역을 검토하고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는 작업은 상당히 번거로운 작업이다. 기계번역의 품질에 따라서는 애초에 백지에서 번역하는 게 시간상 낫다는 번역가들도 있는 실정이고 기존 번역문을 고치는 과정에서 다른 오류들이 발생할 가능성도 적지 않은 작업 특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번역가가 작업하면서 나오는 실수에 대해 경고하거나, 이전 번역과의 어조, 용어 등의 일관성을 제안하거나, 수정한 번역문의 뒷 내용을 일정 알고리즘으로 자동 완성시켜 주는 기능 등 작업 간 번역가를 조력해 주는 효율적인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그래야 PE 작업자 풀을 모집하거나 경쟁적인 단가 구조를 만들어 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4) 고객사와의 긴밀한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마지막으로 HT(Human Translation) 의뢰만 하던 고객에게 MTPE 프로젝트 경험을 할 수 있게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전에도 말했듯 MTPE 프로젝트의 확대가 늦춰진다면 그건 필시 기술 측면보다 사람들의 인식 측면의 영향이 더 클 것이다. 따라서 HT와 비교해서 MTPE 프로세스가 가진 우수성과 효율성을 고객에게 어필해서 번역 시장 내 잠재수요를 표면으로 끌고 나오는 작업이 꼭 필요할 것이고, 이에 성공한 번역 에이전시가 경쟁사에 MTPE 프로젝트의 노하우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경험을 갖게 될 것이다.






3. 기획자로서의 번역가 업무

앞서 기계번역 시대의 번역 업무가 그 이전의 전통적인 번역업무와 동일선상에 있는 업무일 것인 지 질문을 던져 보았다. 필자가 번역가가 아니기 때문에 번역가가 책상 위에서 체감하는 부분을 명확하게 정리할 순 없지만 업무의 양상이나 해당 업무 간 요구되는 능력은 전통적인 번역업무와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 거라는 것까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1) 전통적 번역과 MTPE 작업의 요구 역량

일단 전통적인 번역업무와 MTPE 업무 간 요구되는 능력은 상당 부분 일치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기본적인 소스 언어 및 타깃 언어에 대한 언어 능력 및 문장력, 소스 텍스트에 대한 전문성 내지 배경지식, 서칭 능력 및 성실성은 양 업무 간에도 동일하게 요구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여러 가지 요구 역량 간 비중이나 중요도는 상당히 달라질 것이다. 번역업무를 크게 눈이 하는 일과 손이 하는 일로 나눌 때 전통적인 번역 업무는 손이 하는 일의 비중이 더 컸다면, MTPE 업무의 경우는 눈이 하는 일의 비중이 더 클 것이다. 이미 기계번역으로 초벌 번역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번역본의 오류 및 어조, 문맥 등을 검토하는 일이 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달라지는 번역업무의 양상과 그 영향

이에 따라 원문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번역문의 전체적인 어조와 톤을 설정하고 문맥상 빈출 용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지, 표현적인 부분이나 문장 구조를 어떻게 짜야할지 등에 대해 번역문의 전반적인 틀을 설계, 기획하는 업무의 비중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오탈자, 맞춤법 오류 등을 줄이기 위한 세심함에 대한 요구는 그 비중이 다소 낮아질 것이다. 기본적으로 MT에서는 이러한 오류가 일어날 가능성이 다소 낮고, 설사 번역가가 수정작업 중에 실수를 한다고 해도 기계적 방식에 의해 수정 권장이 된다든지 표시가 된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상당 부분 기계가 보완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작업환경 하에서 번역가는 사소한 문제에 대해 소모되는 에너지를 번역문의 의미 체계, 맥락상의 깊은 이해, 언어적 특성에 따른 표현 방법 등 보다 전문적이고 치밀한 영역의 문제를 푸는 데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젠 원서를 보고 빈 워드 페이지를 몇백 장의 번역문으로 가득 채우는 중노동이 아니라, 훨씬 기획자 같은 입장에서 업무를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상으로 ChatGPT 같은 AI가 횡행(?)하는 시기의 번역 업무의 변화 양상에 대해 현업인으로서 느끼는 바를 정리해 보았다. 언제나 기술 혁신이 있는 곳에는 송곳 같이 기존의 한계를 뚫고 튀어나가는 플레이어들이 생기곤 했다. 아직까진 이 번역 업계에 그런 송곳 같은 플레이어가 눈에 확연히 띄는 위치에 감지되고 있진 않으나, 기술적 혁신을 사업적 혁명으로 현실화하는 조직의 등장이 멀지 않았다는 징조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시대인 것 같다.

다만 부디 그런 파괴적 혁신이 그 안의 무수히 많은 업계인들을 더 팍팍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모두 혁신의 파도가 몰려오는 상황에서 부디 그 위를 타는 보더가 되길 빈다. 건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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