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지가 밤을 도닥인다. 톡톡톡. 휴대폰 불빛만큼 환한 일도 없는데 왠지 액정이 나를 기르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 조그만 쪽창이 나에게 볕을 주고 양분을 줘왔다는 느낌이다. 그토록 쥐고 있었으나 또 그토록 쥐여준 장면들. 하루에도 몇 번씩 쬐어오는 이 온화에 어떤 꽃을 틔워야 하나. 나는 나대로 뻗어왔고 당신은 당신대로 돋아왔으니 우리는 한 시절 들녘에 핀 남모를 연대라고 해야 할까. 검지가 뿌리를 토닥여 뻗는 이 기분. 타전이면서 조응이면서 읊조림 같은 것. 내 볕이 소용돌이치는 지문 속 검지 끝을 스르르 낚아간다.
액정이 끌어당기듯 몇 초간 멍하니 훌쩍, 공기를 머금은 눈동자처럼 멈춰 있다. 어쩌면 이 물리(物理)는 나를 정지해 놓고 무언가를 실행시키는 것만 같다. 내가 나인지도 모를 사이, 다녀가는 이 징후. 기억하지 않아도 될 소소한 것들이 모두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듯, 리모컨이나 열쇠뭉치는 언제나 그곳에 있다. 그곳에 있다, 어둡고 먼 기억 저편에서 나나 너도. 잠이 새고 있어 별이 꿈틀거린다는 그 생각이 공간을 만든다. 마음이 쓰이면 현실은 그 만큼의 자장으로 실재에 감정을 깃들게 한다. 관심 밖은 막막한 암흑으로 떠돈다. 그 수많은 무(無)로 인해 우리에겐 버퍼링이 생기지 않는다. 매순간 의식만이 공간을 재생하기 때문이다. 생각이 감각을 동원하는 순간, 떠돌던 입자도 형체를 갖는다. 그것을 그리움이라 불러도 좋고 바람이라고 들어도 된다. 어제를 기념하면 오늘을 회상하는 먼 날들을 지나는 것처럼.
텅 빈 내 안에서 번개처럼 생각이 인다. 형광등 불빛에 찡그린 화분들. 인생이 어느 날 느낀 계절감 같을 때, 지났던 사람도 두고 왔다고 느낄 때, 고요한 밤하늘의 늑골을 보게 된다. 3차원의 인간이 마음에 시간의 축을 세운다면 운명도 다만 거처일 뿐이라고, 나는 의식하지만 나를 의식하는 세포 속은, 텅 빈 채 전자와 전자가 불현듯 점멸하는 화소라는 걸 설득 당하는 중이다. 1초에 24장이 사진이 사이좋게 지나는 영화를, 활동한다고 믿는, 아니 착각하는 게 우리의 운명이라면 어쩔 것인가. 기대가 현실이 되기까지 미래는 과거를 방랑하다온다. 그곳은 황량하고 어둑하며 기억이 무너져 내린다. 잊어간다는 건 그런 것이다. 외롭고 쓸쓸한 사람이 걷고 또 걷다가,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는 절규.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멈춤, 동공이 확장된 방치. 낡은 거적 뒤집어 쓴 채 모래바람 속에서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 한쪽 눈으로 간신히 뜨는 비밀.
때가 되면 알아서 우는 냉장고처럼 나는 내 속 칸칸의 온도에 길들어져 간다. 이런 날 음악은 몸을 새벽으로 듣는다. 음악이 재생의 속성이라면 나는 나의 속성을 음악에 재생한다. 같지만 조금씩 다른 음악은 조금씩 다른 나를 같게 하므로. 죽은 가수가 살아 있는 청중을 기념하여, 살아 있는 이 밤이 죽음을 기념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이기지 못할 감정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그 감정이 나를 떠나지 못해 생각을 갖고 있다는 걸 안다. 이별이 사랑을 관찰했으니 사랑이 과거를 결정지었을 거라고. 도대체 이 마음을 누가 보고 있는가. 나는 지금 누구의 마음을 믿어 여기에 나타나 기록되는가. 어떤 USB가 내게 껴오는 느낌. 나는 지금 가상이 자꾸만 가상하여, 잠 오지 않는 창밖 밤하늘에서 조명기구가 떨어지는 생각을 별똥말똥 해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