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이어도 괜찮아, 나만 아는 내전성기

프롤로그

by via지우

난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하지 못하던 아이다.
목적도 없고, 개념도 없이 그저 왔다 갔다만 했다.
나를 들여다보기 시작한 게 언제였는지,

이제는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는다.


부모님은 늘 바빴고,

우리 자매에게 삶을 대하는

기준 같은 걸 알려줄 여유가 없었다.
우리는 각자 전쟁 같은 인생 속에서 오기로 버티며,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 살아냈다.
아마 그때부터 조금씩 잘못되어

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욕심이 생겼다.
대학 때부터 감정을 드러내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내 감정이 어떤 건지도 모르면서

남들 따라 웃고 울고,

그렇게 주체성 없는 삶 속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그리고 내 스무 살은

그 남자에게 휘둘리며 흘러갔다.

그래도 그 시절,

누군가 나를 열정적으로 사랑해 준 그 경험이

인생에서 처음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해 줬던 것 같다.
꽃 같던 나의 20대 여.


하지만 나는 거절할 줄도,

감정을 다루는 법도 몰랐다.
그저 불구덩이에 뛰어들듯 사랑했고,
그 사랑의 감정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았다.
그 시절의 나는, 한 남자에 미쳐 있었다.

그렇게 단단하지 못한 마음으로 30대를 맞았다.
나처럼 미성숙한 남자와 함께.

우린 서로 자라지 못한 아이 마음으로

서로를 키우며,

성숙하지 못한 채

함께 자라나고 있었다.


그래도 30대 중후반은

내 인생의 전성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실수는 줄었고, 일은 잘했고, 총명했다.
그때의 나는 일을 잘 해내는 내가 가장 좋았다.
커리어는 쌓였고, 사람들도 내 주변에 많았다.
하지만, 비어 있던 내 인격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게 들킬까 두려워 바둥거렸던 것 같다.

빨리 채워 넣으려 할수록 좌절했고,
그 분노는 나와 같은 남편에게 쏟아냈다.


그렇게 30대의

실수와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남편도 여전히 감정에 휘둘리며 살았다.
우린 각자의 30대에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가정이란 뭘까?”를 진지하게 묻지도 못한 채,
그냥 그렇게 흘러갔다.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까지,
우린 바쁘면서도 공허했고, 자만했고, 거만했다.
미래를 준비하지도, 서로에게 감사하지도 못했다.


40이 되어도 달라진 건 없었다.
그리고 40대 후반,

나는 내가 잘못 살아온 결과물을 마주했다.
마음은 메말랐고,

조급함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두 번의 가족의 이별과, 아버지의 치매,
가족은 엉망이 되었다.
아름다운 치매는 영화 속 이야기였다.
현실의 치매는 더럽고 잔인했다.
잘못된 성격은 병으로 증폭되고,
가족은 서로를 미워하며 무너졌다.


그 속에서 나는 영혼이 갉아먹히는 기분이었다.

남편도 더 이상 버팀목이 아니었다.
나는 어두운 동굴 속에서 on/off 스위치를 찾듯
짜증과 분노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모든 걸 내려놓고 싶어졌다.

돈도 없고, 영어도 못하는 주제에 ,
그렇다고 뚜렷한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해외에서 새롭게 세팅하고 싶어졌다.
현실을 도망치려는 게 아니라,
이기적으로 살고 싶었다.


보통의 가정은 50이 되면 안정이 찾아오나?
남편이 연상이면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았을까?
남들은 그동안 뿌려놓은 걸 거두는 시기일까?
나는 아무것도 이룬 게 없다.
아니,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고 해야 맞겠다.


벌어둔 돈은 다 써버렸고,
그나마 있던 집도,

차도 내 명의로 되어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싸우기 싫어서 다 주고 떠나기로 했다.


계획도, 돈도, 자신감도, 자존감도 없다.

그냥… 무모한 50살 중년의 여자다.
무릎은 아프고, 체력은 떨어지고,
영어 한마디 못하면서도
이상하게 도전만은 좋아한다.

그런 내가 지금도 꿈을 꾸고 있다.

말도 안 되는 꿈을.


남편에 대한 감정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서로 상처 주고받은 세월이 길었다.
그도 나처럼 미성숙한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미워하면서도 짠하다.

이제는 그냥 말하고 싶다.

“우리, 여기까지 하자.
서로의 굴레에서 벗어나 각자 살아보자.
쿨하게, 후회 없이.”

그런 말을 남편에게 하고 싶은 건,
아마 나 자신에게도 그렇게 말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은 용기가 없다.

하지만 언젠가, 정말로 그렇게 말할 수 있길 바란다.


회사도, 사무실도, 돈도, 다 정리해야 한다.
남은 건 빚뿐이다.
이제 뭘 해야 할까?
나는 계속 묻는다.
답이 있을까?
아니, 꼭 답이 있어야 할까?

아니, 꼭 깨끗하게 정리하고

새로 시작해야 하는 걸까?



50이 되고 나니 나는 무명이었네. 그래도 괜찮아, 내전성기는 내가 알아.

프롤로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