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체크인을 하려고 선 줄이 옆줄에 비해 계속 정체될 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다 그 원인이 엄마가 안고 있는 어린아이들의 신분증을 찾기 위해 안주머니를 뒤지는 아빠의 긴장된 모습을 볼 때, 나는 타인의 등 뒤에 세겨진 투명한 글씨를 스캔하는 앱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결이 다른 우도의 바람이 쪽빛 바닷물을 찍어 자전거 바구니에 여행의 #해시태그를 서술한다.
페달이 쉼표 없는 악보를 그리며 해안 도로를 질주한다.
16분 음표, 8분 음표, 4분 음표, 2분 음표, 스타카토...
빠른 박자에 맞춰 풍경들은 스치듯 지나가고, 뒤에서 따라오는 바람에 질세라 직진으로 내 달릴때 앞에서 빨강색 전기차가 느린 달팽이처럼 기어가고 있었다.
브레이크를 잡으며 계속 뒤따르다 보니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일정 빠듯한 여행지에서 이렇게 민폐를 끼쳐도 되는 건가?라는 불만에 추월해서 전기차 운전석을 쳐다보았다.
아쁠싸~
전기차 안에는 몸이 불편한 커플이 조심스레 핸들을 잡고 있었다.
우리는 수평이 되기 싫어하는 경쟁에 익숙해 타인의 행동과 표정은무시한채수직으로만달리다 우를 범할 때가 많다.
나는 여행마져 쉼표 없이 달리던 전기 자전거를 당장 반납하고 처음으로 돌아가 되풀이하여 연주하라는 다 카포의 음표를 생각하며 우도의 속살을 헤집고 마을 트레킹에 나섰다.
곡선의 돌담길을 따라 실핏줄 같은 골목길을 걷다 고개를 들면, 쪽빛 바다에선 숨비소리가 들리는듯하다.
밟히는 돌멩이를 힘껏 걷어차면 바닷물에 풍덩하고 빠질 것만 같다.
지천으로 보이는 노란 유채꽃 사이를 거닐 때마다 바람은 빈약한 내 머리카락을 뿌리째 뽑으려고 달려든다.
청보리밭을 사이에 두고 마늘밭에서 일하는 할머니께 싸온 간식을 드리며 “할머니 유채꽃이 너무 이뻐요”라고 인사를 하자, “지랄맞은 유채꽃에 반해 내 허리가 이 모양이 되었다우!”라며 초승달 같은 허리를 폈다.
섬 속의 해가 상산포를 향해 기울면 여행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우도는 가로등도 일찍 잠을 청한다.
그래서 게스트하우스에선 문닫는식당을 대신해 간단한 요깃거리와 술안주를 제공한다.
우도의 명물 땅콩 막걸리를 사서 숙소에 도착하니 사방에서 찾아온 게스트들이 모두 테이블에 모였다.
두번째 서른이 넘은 정년퇴직자, 입사한 회사에 적응하지 못해 퇴사를 고민하는 신입사원, 제주도에한달 살기로 왔다는 다비드상(조각미남), 이직을 생각하는 카피라이터, 태움에 못 견뎌 사직서를 던진 간호사, 손님들 갑질에 탈모가 되었다는 미용사와 함께 사장님이 준비한 음식을 앞에 놓고 가져온 술을 나누며 통성명과 함께 말문이 트이면, MSG를 뺀 날것의 토크가 상처난 가슴의 흉터들을 무늬로 치환한다.
사장님이 야경투어를 제안해 밖으로 나오자 밤하늘은 별빛 맛집 답게 북두칠성이 머리 위를 따라다녔고 서쪽 하늘엔 주황색 초승달이 스탠드를 켠 듯 선명하게 보였다.
사표를 던진 간호사가 초승달이 몰디브 국기를 닮았다며 내일 아침 몰디브같은 비양도에서 일출을 보고 해장국으로 갈칫국을 먹자는 제안에 상처가 봉합된 청춘들이 큰 박수로 찬성했다,
다음날 일출을 보고 우도의 미슐랭 3스타가 된 갈칫국으로 해장을 한 후 각자 여행지로 흩어졌다.
어떤, 문장하나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수에서 자라는 곤봉 바다 맨드라미과에 속하는 <밤수지맨드라미>처럼 카피라이터와 디자이너가 만나 소섬에서 독립서점을 6년째 지키고 있다고 한다.
파란색 간판이 바다와 닮았다는 생각을 하며 눈에 띄는 책을 골랐다.
류시화 에세이 <우리가 함께 여행하는 시간은 너무 짦다>를 펼치니,
인생은 길을 보여주기 위해 가끔씩 길을 잃게 한다.
돌아가는 길투성이 인생에서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인생은 쉼표 없는 악보와 같아서 연주자가 필요할 때마다 쉼표와 악보를 그리며 연주해야 한다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고독한 선지자는 니체의 문장에 밑줄을 긋는데 생각만 하고 쓰지못한 궁색한 나는 남이 찾아 논 문장에 겨우 밑줄을 그었다.
오스트리아의 거장을 만나다
오전에 우도봉을 산책하고 돌칸이에 있는 훈데르트바서 미술관을 찾았다.
컬러플한 양파 모양의 건축물에 이끌려 티켓팅을 하자 오늘은 관람객이 없어서 운수 좋게 나 혼자 도슨트 해설을 듣는다고 말했다.
먼저 우리들의 블루스로 유명한 정은혜 작가의 작품 설명을 듣고, 오스트리아 3대 거장으로 불리는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와 함께 환경운동가인 훈데르트바서가 지향한 색채와 유기적인 형태로 그린 곡선의 미학을 시작으로 미술관 투어가 시작되었다.
직선이 아닌 나선의 화가는 병든 건축을 위하여 <창문의 권리>를 주장하며
“우리는 자연에 초대받은 손님입니다.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를 강조하며 환경운동의 선구자로 자연을 가장 기본으로 두고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스페인 구엘공원을 닮은 부서진 타일의 화려한 파사드 양파존에서 그림 속을 거니는 듯한 예술적인 체험을 하고, 핫한 포토존에서 셀카도 찍고, 성산포가 정면에 보이는 <돌칸이> 카페에서 땅콩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버킷리스트에 담긴 혼자떠나는여행을 지웠다.
퀘렌시아
투우에서 유래한 퀘렌시아는 투우장에서 투우사와 격전을 치르던 소가, 투우장 한편에 마련된 소를 위한 피난처 또는 쉼터에서 체력과 힘을 회복하는 장소로 다른 관중의 시선이 차단되어 투우소가 안정을 되찾을 수 있는 장소를 말한다고 한다.
헤밍웨이는 스페인 론다 지역에서 집필 당시 수십 번 넘게 투우장을 들락거리며 “소는퀘렌시아에 있을 때 말할 수 없이 강해져 쓰러트릴 수 없다”라고 썼다.
직진하는 일상에 잠시 속도 방지턱을 놓아주는 시간, 내면의 안식처 혹은 피난처를 발견하는 시간, 타인과 술잔을 나누며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내는 환기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