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서구 패러다임에서 출발한 서양학의 산물입니다. 고대의 서구인들은 이 세상을 직선과 평면으로 인식했습니다. 눈으로는 그렇게 보이니까요. 예를 들어보죠. 점 A와 점 B를 잇는 가장 빠른 선은 무엇일까요? 서양학 교육을 받은 우리들은 대부분 '직선'으로 인식합니다. 아래 지도에서처럼.
Seeing is not always Believing.
fact는 무엇일까요? 그 '직선'은 사실 '곡선'이었죠. 아래의 지구본 그림을 보세요. 금방 이해가 되시죠? '직선'이라는 인식의 오류는, 공간을 분리하고 그 일부만 바라본 것에서 기인한 착시 현상이었습니다.
서구의 학자들은 대항해시대를 거치며 지구를 한 바퀴 돌게 되자 점차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알고 보니 이 세상은 직선과 평면이 아니라 곡선과 입체의 세계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거죠.
서양학은 막다른 골목에 몰렸습니다. 특히 물리학이 큰 타격을 받았죠. 기존의 '고전물리학에 기반한 지식'들은 오류임이 증명되기 시작했고, 20세기에 아인슈타인의 상대론과 닐스 보어 등의 양자론이 속속 등장하면서 세상을 완전히 새롭게 바라보는 '현대 물리학(양자물리학)'이 탄생하였습니다.
'고전물리학'은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양陽의 과학'이라고도 합니다. 반면에 '양자물리학'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음陰의 과학'이라고도 하죠. 음양 · 태극 · 색즉시공色卽是空과 같은 동아시아의 지혜의 패러다임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것이라네요.
21세기 대한민국은 아직도 20세기 이전의 서양학 · 고전물리학에 기반한 '지식'을 교육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동아시아의 학문과 패러다임에 입각한 '지혜'를 가르치고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지식'과 '지혜'는 어떻게 다를까요?
(1) '지식'은 시각적이고 '지혜'는 청각적입니다.지식의 전제는 Seeing is Believing. 사물을 바로 눈앞에 보이는 대로만 인식합니다. 생각이 짧을 수밖에 없죠. 지혜의 전제는 Seeing is not always Believing. 현상세계의 시각에 의존하지 않고, 삼라만상에 흐르는 내면의 소리를 마음으로 들으며 깊이 사유합니다. 생각이 깊어지고 먼 곳을 내다보게 됩니다.
(2) '지식'은 금방 사라져 버리지만 '지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현상세계는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그에 따라 '지식'은 순식간에 옛날 것이 되어버리고 '새로운 지식'은 끊임없이 탄생하게 마련이죠. 그러나 '지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삼라만상은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아무렇게나 변화하는 게 아니라 일정한 내재 규율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달이 한 달을 주기로 차고 기우는 현상이 그 좋은 사례죠.
(3) '지식'은 '직선 인생'을 낳고 '지혜'는 '곡선 인생'을 모델로 삼습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므로, 자연과학의 법칙은 인간 삶의 방식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점 A와 점 B를 잇는 가장 빠른 선을 직선으로 착각하고 사는 인생은 보다 빨리, 보다 많이, 보다 높은 곳에 올라서려고 발버둥 칩니다. 타인과의 경쟁에 이겨서 남들 위에 군림하는 것을 출세와 성공으로 인식합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아직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직선과 평면의 패러다임은 사실 허상이 낳은 오류였죠. 직선 인생은 필연적으로 허망함을 가져옵니다. 대한민국이 자살공화국이라는 통계가 이를 증명해 주는 것 아닐까요?
점 A와 점 B를 잇는 가장 빠른 선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임을 깨닫고 사는 인생은, 느리게 사는 방법을 통해 삶의 충일감을 얻습니다. 작은 것, 적은 것에서 삶의 즐거움과 기쁨을 찾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대한민국의 대학은 노자老子가 말한 "곡즉전 曲即全", 곡선 인생의 전인全人 교육을 시행해야 한다는 것!
여기까지가 지난 시간까지 소오생의 주장이었습니다.
이제 다 기억나시죠?
자, 그럼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
#2. 닐스 보어의 원자 모형
먼저 잠시 생각해 보는 시간입니다. 닐스 보어는 1913년 원자의 모형 이론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1922년에 그 이론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습니다. 최신 현대과학인 양자물리학의 출발이었죠. 여러분께서도 중고등학교 때 배우셨을 텐데요, 혹시 그 모형이 어떤 모습인지 기억하시나요? 아래의 좌측그림과 같습니다.
엇? 근데 원자의 구조가 태양계의 구조(위의 우측 그림)와 똑같이 생겼네요?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소오생은 이 모형을 처음 보자마자 그게 너무 궁금했답니다. 이상한 건 또 있었죠. '원자 atom'란 게 사물을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가장 작은 단위라면서요? 근데 가장 작다는 그 속에 왜 또 원자핵이나 전자 같은 게 있다는 거죠? 이게 말이에요 막걸리예요? 여러분은 그런 생각 안 드셨나요?
소오생은 소위 말하는 '문제아'였습니다. 유치원은 구경도 못했고요, 초등학교는 목포라는 낯선 동네에 가서 일 년에 한 번씩 전학 다니면서 때웠거든요? 생전 '공부'라는 걸 해본 적이 없답니다. 덧셈 뺄셈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으니 말 다했죠. (군대에서 화투를 배우면서 덧셈을 배우고 익혔답니다. ㅋㅋ) 그런데 어떻게 중학교 시험에 합격해서 서울 소재 학교를 다녔는지 기적 같은 일입니다. 상황이 그러하니 중고교 시절 수학 · 물리 · 화학은 당연히 거의 늘 빵점 수준. ㅋㅋㅋ
그러니 '원자 모형 수수께끼'도 저만 모르나 보다... 생각했더랬죠. 감히 선생님께 여쭤볼 엄두도 내지 못했어요. 근데 다른 친구들도 모르더라구요. 아니, 별로 궁금해하지도 않더라구요. 물리 선생님은 왜 그런 건 안 가르쳐주셨을까요? 혹시 여러분은 아시나요? 원자가 사물의 가장 최소 단위라고 해놓고서 왜 그 안에 또 다른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인지, 근데 그게 왜 태양계를 닮은 것일까요? 닐스 보어는 또 그걸 어떻게 알아냈을까요? '수포자'였던 제 삶의 오랜 화두였습니다.
#3. <리미트 제로(limit 0)>와 <무한대(∞)>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어느 가을날의 오후로 기억됩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수학 시간이었죠. '시체'라는 별명의 수학 선생님이 들어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평소와 다르게 '수학'이 아닌 '엉뚱한 이야기'를 해주시더라고요? '시체 선생님'은 먼저 칠판에 아래와 같은 '수학 공식'을 쓰셨습니다. 그리고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신기하고 놀라운 이야기를 시작하셨어요.
여러분, 이 교실에는 70 명이 있다. '나'는 1/70이다. 우리 학교에서는 1/4000, 우리나라 전체로 보면 5천만 분의 일, 지구상의 인류 전체로 보면 50억 분의 일에 불과하다. 공간 비중으로 따진다면 훨씬 더 적다. '내'가 지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 하나도 안 된다. 그런데 그 지구는 거대 우주에서 한 점 먼지와도 같은 존재다. '나'의 존재는 그야말로 '리미트 제로', 0이나 다름없는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라는 존재는 수없이 많은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닐스 보어의 원자 모형을 보라. 어떻게 생겼는가? 지구가 위치한 태양계와 똑같이 생겼다. 하나하나의 원자들이 모두 우주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소우주가 모인 또 다른 거대 우주라는 이야기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나는 '무한대(∞)'의 존재 아닌가!
잊지 말아라!
여러분은 모두 '리미트 제로'인 동시에'무한대(∞)'의 존재임을.
저의 존재가 거대 우주 앞에서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위축되고 허망했었죠. 그런데 제가 또 다른 '우주'라니요! 선생님의 말씀에 정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간단한 수학 '공식(?)'에 이렇게 감동적인 우주의 구성 원리가 담겨있다니요!
수학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달라져 버렸죠. 비록 덧셈 뺄셈을 제대로 못해서 성적은 여전히 바닥을 헤맸지만, 문제를 푸는 방법만큼은 누구 못지않게 익숙해져서 친구들에게 설명을 해주기도 했으니까요. 학습 동기 부여가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깨달았답니다.
아무튼 '시체 선생님'의 그 말씀은 닐스 보어의 원자 모형 수수께끼와 함께 제 평생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소오생강의의 핵심 내용 중의 하나가 되었죠. 제가 오랜 세월에 걸쳐 정리한 강의 노트를 공개합니다.
#4. 소오생의 정리 노트
(1) 삼라만상에는 세 개의 세계가 있다.
① 일반적 현상의 세계 : 육안으로 보이는 세계
② 매크로 Macro의 세계 : 천체망원경으로 보이는 별들의 거시巨視 세계
③ 마이크로 Micro의 세계 : 원자현미경으로 보이는 미시微視 세계
우리의 기존 '지식'은 대부분 '일반적 현상의 세계'만을 대상으로 한 '인지 체계'에서 얻은 것이다. 그 '지식'은 대부분 단편적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편견과 오류가 많다.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 시대에 확립된 대한민국의 '학문'과 '교육'은 아직도 이 수준에 머물러 있다. '교육'이 아니라 '세뇌' 수준이다.
그러나 삼라만상에는 그 외에도 매크로의 세계와 마이크로의 세계가 존재한다. 21세기 최신현대과학은 천체망원경과 원자현미경으로 그 세계의 존재를 이제야 확인하고 있지만, 고대 동아시아의 최고 지성인들은 명상과 사색을 통하여 그 세계를 바라보았다.
(2) 삼라만상의 기본 구조는 똑같다. 인드라망으로 연결되어 있다.
닐스 보어의 원자 모형은 모든 삼라만상의 최소 구성단위의 내부 구조가 똑같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런데 최소 단위인 원자뿐만이 아니다. 한 사물의 일부와 전체가, 마치 우로보로스의 뱀처럼 무한 반복하여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눈(雪)'과 '인체人體'다. 현대과학에서는 이것을 프랙털 Fractal 원리라고 한다.
프랙털 원리는 동일한 사물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물 간에도 적용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간의 뇌 신경과 우주다. 이탈리아 볼로냐대학 천체물리학자와 베로나대학 신경외과 의사로 이뤄진 연구팀은 인간의 뇌와 우주의 구조가 매우 유사하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 연구팀이 국제학술지 《Frontiers in Physics》온라인판에 발표한 아래의 사진을 보자. 2020. 11. 16.
(좌)는 전자현미경으로 본 40 배율 소뇌의 단면. (우)는 가로·세로가 각각 3억 광년인 우주의 시뮬레이션 구조.
놀랍게도 이 두 세계는 단순히 겉모습뿐만 아니라 수학적으로도 대단히 유의미한 유사성을 보인다. 다시 아래 사진을 보시라. (좌)는 우주, (중)은 소뇌, (우)는 대뇌 피질의 연결망(파란색)이다. (출처: 상동)
연구팀은 이 사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아래와 같은 결과를 얻었다.
① 관측 가능한 매크로의 세계, 우주 안에는 약 1000억 개의 은하들이 존재한다. 마이크로의 세계인 뇌 속 신경에는 약 1000억 개의 뉴런이 모여서 수많은 시냅스로 연결되어 있다.
② 마이크로의 세계, 뇌의 전체 질량에서 뉴런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25퍼센트다. 나머지 75퍼센트는 물로 채워져 있다. 매크로의 세계, 우주도 비슷하다. 우주에서 중력으로 모일 수 있는 일반 물질과 암흑물질은 우주 전체 구성 요소의 25퍼센트 정도다. 나머지 75퍼센트는 우주 팽창을 가속시키는 미지의 암흑 에너지다.
소오생의 결론:삼라만상 모든 것의 구성 원리는 동일하다. 삼라만상을 구성하고 있는 가장 작은 단위 속에는 또 다른 우주가 펼쳐진다. 그 우주의 최소 단위에서도 마찬가지로 또 다른 우주가 펼쳐진다. 이 프랙털 원리는 무한 반복적으로 적용된다. 우리 모두는 하나하나의 우주이며, 이 모든 우주는 치밀한 망으로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다. 마치 영화 <아바타>의 에이와 나무의 뿌리처럼, 그리고 현대사회의 인터넷망처럼.
이상이 21세기가 되어서야 최신 현대과학의 힘으로 밝혀지기 시작한 우주의 구성 원리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그 원리를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유와 명상의 힘으로 깨닫고 있었다.
'인내천 人乃天' 패러다임이 그 대표적이다. '내乃'는 '바로 곧'이라는 뜻. 그러므로 '인내천 人乃天'은 [ 사람(나) = 우주 ]라는 뜻이다.
또 《화엄경華嚴經》의 인드라망(網) 패러다임도 있다. '일중일체다중일 一中一切多中一',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 속에 하나가 있다는 인식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그물처럼 촘촘하게 얽혀있다. 그 그물을 우리는 '인연'이라고 부른다.
그림 출처: EBS 다큐멘터리《동東과 서西》. 2008년 4월, 2회로 나눠 방영.
양자물리학/현대과학은 동아시아 패러다임의 기반 위에서 출발한 것이다. 닐스 보어가 《주역》과 음양오행, 태극의 상호상보설相互相補說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특히 그의 연구소 문장이 태극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그는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할 때에도 팔에 태극 문양을 한 옷을 입었다.
아시다시피 제 주전공은 중국문학과 중국문화입니다.
그런데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런 강의록을 만든 걸까요?
첫째는 학생들에게 열등감과 교만함 대신 자신감과 겸허함/겸손함의 지혜를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는 학습 동기를 제대로 부여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저 나름대로 깨달은 삶과 우주의 원리를 알려주고 싶어서입니다.
셋째는 새로운 학습의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수학과 문학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마찬가지로 지식과 지혜 또한 사실 별개의 것이 아니지요. 문제는 교육 방법 아닐까요? 잘못된 중국어 교육이 중국어가 어렵다는 편견을 더욱 가중시켰듯이, 수학과 문학 교육도 동아시아의 일원론 패러다임에 입각해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것으로 학문하기>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그런데 그런 얘기를 하자니 글이 너무 길어지네요. 아무래도 여기서 한 호흡 쉬고, 다음 글에서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시간을 끌지 않고 곧바로 '발행'할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 계 속 >
[ 대문 사진 설명 ]
◎ 매크로의 세계다. 프랙털 원리에 의하면 저와 유사한 모습이 마이크로의 세계에도 무한 반복으로 펼쳐져 있다. 대 마젤란운의 타란툴라 성운. 2012년 4월 23일에 허블 우주 망원경으로 관측하여 합성한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