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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Oct 18. 2024

10. 슬퍼하지 말라 노여워하지 말라

우리 것으로 학문하기 (4)

지난번 이야기의 제목은...

<09. 먼 곳의 벗이 찾아오니 참으로 즐겁구나!>


《논어》의 맨 처음 구절, 즉 공자님 어록집의 1장 1절과 2절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번에는 그 뒤로 이어지는 1장의 마지막 구절인 제3절 이야기입니다.

먼저 1절/2절과 함께 대조 비교하며 읽어보실까요?


▷ 1장 1절: 배우고 늘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 1장 2절: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 1장 3절: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노여워하지 않으면 군자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人不知而不愠,不亦君子乎!
인불지이불온, 불역군자호!

《논어 · 학이學而》


어떠셔요? 글의 맥락이 잘 이어지는 것 같은가요? 아, 참 희한합니다. 이번에도 역시 내용이 그다지 잘 이어지지 않는 것 같은 느낌. 3개의 구절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며 부조화를 이루는 것 같네요. 하지만 글자의 이면에 흐르는 공자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곰곰 사색에 잠겨보세요. 그러면 이 세 구절이 얼마나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감탄사가 터져 나오리라 믿습니다.





1절은 '배움(學)'과 '익힘(習)'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배움'은 정신적인 공부고, '익힘'은 실천적인 공부입니다. 어쩌다가 한 번 하고 끝내는 게 아니라 '늘 익히는 것 時習'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배우고 익히는 공부'는 높은 산의 정상을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 무엇을 통해서 올라가는 걸까요? 암기를 통해서? 아닙니다. 글쓰기! 글쓰기는 배운 것을 자기 것으로 익히는 최적의 방법이지요.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엇? 더 오를 곳이 없네?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정상이네요? 스승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깨닫는 그 순간, 어찌 아니 기쁠 수가 있겠어요? 그래서 환희의 탄성을 내지릅니다.


배우고 늘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2절은 '벗 朋'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벗 붕朋'은 선진시대부터 늘 '벗 우友'와 함께 존재했던 단어였죠. '붕'은 정신적인 지향점, '우'는 실천적인 의미로서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나가기 위해, 나와 함께 더불어 사랑을 실천해 나가야 할 존재가 바로 '벗'이었습니다.


무엇을 통해서 사랑을 이루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자는 것일까요? 권력과 돈을 통해서? 아닙니다. '벗'과의 '글쓰기'를 통해서입니다. '벗'이란 뜻을 알고 보니 '글벗'! '글쓰기'는 '벗'과 '나'를 서로 격려하고 응원하며 둘을 하나로 묶어주는 최고의 무기였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죠. 참된 '글벗'을 만나는 기적 같은 인연을 기대하는 건 망상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망상'이 '현실'이 된다면, 절대로 못 만날 것 같았던 그 '글벗'의 존재가 기적처럼 내 눈앞에 나타난다면 어떤 기분이 될까요? 저절로 탄성이 터지지 않을까요? 이렇게 말이죠.


먼 곳에서 글벗이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하지만 현실은 늘 냉엄하지요. 명철한 판단력으로 상대방의 내면 가치를 알아주고 인정해 주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 여건을 충족시켜 주었다 하더라도, 상대방의 결점까지 포용하고 양보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죠. 설령 그것까지 포용하고 양보했다 할지라도, 고난과 역경의 인생 항로는 당사자의 의지만으로 개척해 나갈 수 없는 경우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이런저런 이유로

'글벗님'이 찾아왔던 그 순간... 다시 떠나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슬플까요. 얼마나 외로울까요.

차라리 처음부터 오시지나 말 일이지, 더욱 절망하여 자책하고 원망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혹시... 그런 경우가 없으셨나요?

그때를 대비하여, 공자님은 이런 말씀을 준비하고 계시는군요.


설령 너의 내면 가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설령 너의 결점까지 포용해주지 않더라도,
설령 너의 의지대로 '붕우'의 관계가 유지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슬퍼하지 마렴.
노여워하지 마렴.
그래야만 진짜 군자, 참된 지성인이란다.


이게 바로 1장 3절에서 우리를 위로해 주는 공자의 따스한 권면의 말입니다.

문득 푸슈킨(Aleksandr S. Pushkin : 1799~ 1837)의 시가 생각나네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고통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찾아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오늘은 언제나 슬픈 것

모든 것은 한순간에 지나가는 것

지나가는 것은 또다시 그리워지는 것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낭송







저는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고 싶습니다. 저 스스로 수양과 학문에 게을리하면서 참된 글벗 얻기를 바란다는 것은 허망한 욕심이요 자가당착의 모순일 테니까요.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라 하였으니, 모든 것은 제 마음이 작용하여 만든 결과물일 테니까요.



글벗님이 흔쾌히 인정해 줄 수 있도록 제 내면의 완성에 더욱 힘쓰겠습니다.

글벗님이 기꺼이 포용해 줄 수 있도록 제 결점을 더욱더 줄여 나가겠습니다.

글벗님이 즐겁게 의지를 키워 나가시도록 더불어 의지를 키워 나가겠습니다.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제 마음이 작용하여 결과물을 만든다 하였으니, 그때가 되면... 제 가치를 인정해 주는 글벗님이 나타나 주시리라 믿습니다. 떠나가신 글벗님도 다시 찾아주시리라 믿습니다. 일회성의 글벗님도 언제나 늘 함께 하며 서로 힘이 되어주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구절을 떠올려 봅니다.

   

함께 밝은 존재가 되어 서로 비춰줘라.
같은 무리가 되어 서로 힘이 되어줘라.
구름이 용을 따라가듯, 바람이 호랑이를 따라가듯!

同明相照, 同類相求。 雲從龍, 風從虎。

《주역周易 · 건괘乾卦》


‘붕우朋友’란 이런 존재였군요! '참된 글벗'이란 이런 존재였군요! 맑고 고운 정신적 세계의 높은 영역에 올라, 서로 밝게 어두운 세상을 비추어주는 '동명상조同明相照'의 존재였군요!


그러고 보니 비록 문자학적으로 고증할 수 있는 학술적 근거는 부족하지만, 오늘날의 ‘붕 朋’이란 글자가 '두 개의 달(月)이 서로 비추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우연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글벗님과 함께 세상을 훤히 밝히며... 구름이 용을 따라가듯, 바람이 호랑이를 따라가듯 서로 의지하고 힘이 되어주는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듣기만 해도, 읽기만 해도, 심장이 뛰고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으시나요?





역사를 보면... 그래도 글벗이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니, 허다합니다.


삶의 현실은 냉혹하고 비정합니다. 공자와 같은 성인聖人이 나타나서 맑고 어진 행동을 쌓으며 괴롭고 힘들게 살았던 이들을 따스하게 위로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가난 속에 비참하게 살다가 요절하는 경우도 허다하게 많습니다. 그래서 사마천과 같은 이는 말할 수 없는 울분을 터뜨리지요.


"천도天道는 공평무사하여 늘 착한 사람들과 함께 한다"라는 말이 있다.
 
현실은 어떠한가? 백이, 숙제와 같이 착한 이들... 그들은 맑고 어진 행동을 쌓으며 살았는데도 끝내 굶어 죽고야 말았다. 공자는 칠십 명의 제자 중에서도 학문을 사랑하는 제자로 안연顔淵을 유일하게 꼽았다. 그런데 그는 늘 가난에 허덕여 조악한 음식을 먹고 지냈다. 그러면서도 만족할 줄 알았건만, 끝내 요절하고야 말았다.

아아, 하늘이 선한 사람들에게 베푸심이 어찌 이와 같단 말인가?   

도척盜蹠 같은 자를 보라! 매일 무고한 양민을 죽이고, 사람 고기를 회쳐 먹으며 수천 명씩 떼거리를 지어 천하를 횡행하며 포악 방자한 짓을 일삼아도 끝내 천수를 다 누리고 죽었으니, 이게 어찌 된 하늘의 이치란 말인가?

행동거지가 법도에서 어긋나고, 저질러서는 안 될 죄악을 저지르는 인간들은 죽을 때까지 즐거움만 누린다. 설사 죽은 후에라도 몇 대 후손에 이르기까지 그 재산의 풍족함이 끝날 줄을 모른다.

어떤 이들은 땅을 골라가며 조심스레 밟고 다니고, 시기가 무르익고 난 다음에야 조심스레 말하며, 길이 아니면 다니지 않고, 공명정대한 일이 아니면 나서지 않는데도 재앙을 당한다. 이런 경우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구나!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러고도 '하늘의 도리'라는 것이 과연 옳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사마천, 《사기 · 백이열전》
或曰: ‘天道無親, 常與善人。 ’ 若伯夷·叔齊, 可謂善人者非邪? 積仁絜行如此而餓死! 且七十子之徒, 仲尼獨薦顔淵爲好學。 然回也屢空, 糟穅不厭, 而卒蚤夭。 天之報施善人, 其何如哉? 盜蹠日殺不辜, 肝人之肉, 暴戾恣睢, 聚黨數千人, 橫行天下, 竟以壽終。 是遵何德哉? 此其尤大彰明較著者也。 若至近世, 操行不軌, 專犯忌諱, 而終身逸樂, 富厚累世不絶。 或擇地而蹈之, 時然後出言, 行不由徑, 非公正不發憤, 而遇禍災者, 不可勝數也。 余甚惑焉, 儻所謂天道, 是邪非邪?


낭송, 사마천의 통곡. 《사기 · 백이열전》에서



그러나 사마천은 모순의 현실에 통곡하면서도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말합니다.

 “겨울이 되고 난 연후에야 소나무 측백나무가 나중에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온 세상이 혼탁해야만 맑은 선비가 비로소 드러나 보이는 법이다.
장수長壽와 부귀영화 따위를 중시한답시고, 어찌 이와 같은 삶을 가벼이 여기랴!  
 “군자는 죽어서 자신의 이름이 칭송받지 못함을 염려한다.”

“歲寒, 然後知松柏之後凋。”  ≪논어․ 자한≫ 인용어.
擧世混濁, 淸士乃見。 豈以其重若彼, 其輕若此哉?
“君子疾沒世而名不稱焉。 "  ≪논어․위령공≫ 인용어

사마천, 《사기 · 백이열전》에서


부평초처럼 덧없는 한 세상 짧은 세월의 흐름에 연연하지 말자,

유구한 역사 속에 맑고 고운 이름을 남기도록 하자고 권면하고 있네요.

여러분 글벗님들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정리를 해볼까요?


'글쓰기'는 배운 것을 나의 것으로 익히면서 스승의 경지에 다가서는 최적의 방법입니다. 사랑을 이루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최고의 수단이지요. 그러나 글쓰기는 어렵고 힘든 작업입니다. 혼자만의 글쓰기를 통해 싱그러운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일은 참으로 지난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말하죠. '글벗'과 함께 하라. 글벗과 함께 어두운 세상을 비추면서 서로 격려하고 응원하라. 글쓰기로 타인에게 이바지하는 삶이야말로 진짜로 기쁘고 즐거운 삶이다. 그렇게 일깨워줍니다. 그게 공자님 어록집 《논어》의 일장 일절과 이절의 내용이었죠.


그런데 만약... '글벗'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나타나더라도 금방 사라진다면? 공자는 삼절에서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슬퍼하지 말고 노여워하지 말아라. 너 자신의 내면세계를 더욱 충일하게 갈고닦아라. 그러면 또다시 찾아올 것이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듯이 더욱 공고한 관계 속에 더욱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소오생은 그렇게 해석합니다. 배운 대로 익힌 부족한 가치관입니다.


그런데 만약, 만의 하나, 끝끝내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번에는 공자의 뜻을 이어받은, 공자의 참된 글벗 사마천이 말합니다. 말할 수 없이 슬프고 노엽지만, 그렇다고 해서 짧디 짧은 삶의 한 순간 부귀영화 때문에 역사에 영원히 오점을 남길 수는 없지 않은가! 유구한 역사 속에 우리의 맑고 고운 이름을 남기도록 하자. 무엇으로? 글쓰기로! 우리가 사마천의 《사기》를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글쓰기는 이렇게 소중합니다.

글벗은 이렇게 싱그러운 존재입니다.

어찌 아니 함께 하겠습니까.


소오생의 소중한 글벗 여러분, 사랑합니다.

늘 응원하고 지지합니다. 힘내세요, 화이팅!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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