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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Mar 21. 2023

제로섬 게임

A Different Age

나와 당신 단 둘이 오롯이 그라운드에 서있다. 그리고 그 어딘가에는 공 하나가 놓여있다.


내 골대와 당신의 골대사이의 거리는 어느 정도 일까. 야속하게도 조명은 그 거리를 가늠할 만큼 비추지 않는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당신과 나는 공을 잡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기고 싶지만 지는 것이 너무나 두렵기에 어둠을 핑계로 서로 공을 잡지 못하는 상황을 바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넣어야 끝나는 제로섬 게임이기에 시간은 우리네의 편이 아니다. 이 경기를 만든 사람은 그런 처절한 모습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다만 확실한 것은 나와 당신의 골대가 있고 공은 하나뿐이라는 것.


골대에 공을 넣기만 하면 끝나는 단순한 게임.


내가 생각한 당신은 꽤나 치열해 보이고 지쳐 보인다. 그리고 여기서는 질 수 없다는 결심을 가진채 굳은 표정으로 킥오프를 준비하고 있지 않을까. 그에 비해 나는 아무 표정이 없다. 딱히 당신보다 간절해 보이지 않아 보인다. 나는 어쩌면 이골이나버려 체념해 버린 걸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그런 내 모습을 모르기에 더 긴장하고 있다. 나의 포기에 가까운 체념이 당신에게는 내가 긴장하지 않고 실력을 가진 사람처럼 생각하게 하니, 이것은 참 역설적이다. 꺾여버린 채 아무 미동도 하지 않는 나의 모습이 오히려 당신에겐 조급함과 불안함을 느끼게 한다. 사실 이미 나와 당신 모두 서로에게 겁을 먹고 있는데 말이다.


나는 당신을 모른다. 당신 또한 나를 모른다. 우리는 어쩌면 붐벼대는 1호선의 3번째 칸에서 핸드폰을 바라보며 마주했을지도 모르지만, 줄이 길게 늘어선 환승역의 오르막에서 누구보다 가깝게 있었을지도. 그렇게나 가깝게 있었던 당신의 옷차림조차 기억나지 않으니 스쳐만 가도 인연이라는 말은 이제 우리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말이 돼버린 게 아닐까. 우리의 옷깃은 분명 스쳤을 텐데, 오고 가는 무수한 발걸음 소리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선 통신에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 되어버렸다.


휘슬이 울리고 당신과 나의 제로섬 게임이 시작되었다. 운 좋게도 공은 내 주변의 가까운 곳에 있었고 고요한 적막 속 공을 차는 소리를 듣고 내가 공을 찾았다는 것을 안 당신은 울먹이고 있다. 시작 전의 이번만큼은 져서는 안 된다는, 넘어지고 부서진 당신에게서 간신히 짜낸 용기와 희망이 벌써 증발해버리지 않았을까. 바닥끝까지 긁어모아 짜낸 절박함은 너무나 쉽게 사라진다. 너무나 허무하게.


공을 잡았다. 이미 쓰러진 상대를 피해 상대방의 골대에 넣기만 하면 끝이다. 그러면 끝이 어디인지 모르는 이 짓들을 또 할 수 있다. 어쩌면 잠깐 스쳤을 당신에게 연민 따위는 없다. 아니,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을지라도 이겨야만 하기에 수많은 감정다발들을 자르면서까지 이겨야 하는 것일지도.


공을 만지작 거리다 비어있는 골대를 향해 손쉽게 공을 넣었다. 그리고 휘슬이 울리고 또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제로섬을 또 해야 한다. 이겼다는 안도감으로 그동안의 불안과 지침이 조금이나마 해소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또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제로섬에서 계속 미친 듯이 불안하고 허탈한 이 무언가를 계속해서 해나가기를 바란다.


물론 당신이.


공을 만지작 거리다 비어있는 골대를 향해 손쉽게 공을 넣었다. 당신의 골대가 아닌 내 골대에 나는 자살골을 넣었다. 당신의 골대에 가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몰랐기에 나는 가까운 내 골대에 공을 넣었다. 당신의 골대까지 갈 힘조차 없었기에, 또 다시 반복되는 이 미친듯한 경쟁에서 더 존재하기엔 나 자신이 이미 너무 부서저버렸으니. 사형 집행전 뒤늦게나마 회개하는 사형수의 간절함처럼, 사라지기전 어떻게든 마음의 짐을 털어 놓고 싶어하는 어떤이처럼, 그런 연민의 감정으로 행한 것이 아니다. 내 마지막은 내가 결정하고 싶었기에, 난 단지 이기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그것은 또 당신에게는 구원처럼 느껴졌을지 않을까. 이것 또한 참 역설적이다. 내가 먼저 공을 잡은것도 애초에 공정하지 않은, 이미 기울어져버린 운동장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승부는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결정되있었겠지. 


어찌 되었든 자살골도 골이기에, 나는 내 골대에 골을 넣었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래도 결국 골을 넣었다. 시작부터 모든 것이 전부 모순이였던 이 곳에서 나는 벗어나고 싶었으니까.


https://youtu.be/n1h1AOeVQ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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