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붙은 연탄인지 숯인지 모를 것이 활활 타오른다. 나는 그것을 멍하니 보고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좀 늦는다며 전하는 그의 미안함을 뒤로한 채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고깃집의 선전인지 아니면 편의를 위해 놔둔 것인지 모를 거리에 있는 줄지어 자리한 의자에 앉아 그것의 타오름을 보고 있다. 연탄같이 생긴 그것이 숯인지는 모르겠지만 고깃집에 숯불이라는 말이 없으니 그것은 연탄의 일종이지도 않을까.
고깃집의 흡연자들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거리가 넓기에 놔둔 것인지 모를 의자에 앉아 그것의 활활 타오름을 나는 보고 있다. 누군가가 와서 그것의 몇 개를 꺼내간다. 그것이 몇 개가 들어있는지 모르기에 몇 개를 꺼내가든 또 다른 몇 개가 그 자리를 대신하여 타오른다. 뜨거운 자신의 주변과 함께 타오른다. 그리고 그것은 곧 붉어진다. 안도현 시인의 시가 생각나는 건 내가 지금 그것을 보고 있어어서일까, 아니면 나는 그런 존재가 되지 못해서일까.
언제든 대체되듯이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를 그것들은 누군가의 식탁을 위해 쓰여간다. 정을 붙일 틈도 없이 떠나간다. 그래도 그것이 쓸모가 있기에 금방 바뀌어지는 걸 알기에 그것들은 그것대로의 삶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가엾다기보다 부러움이 드는 것은 왜일까. 저녁 7시 한복판의 종각에서 셀 수 없이 나타나는 사원증을 목에 건 사람들 사이의 사회에 나는 속하지 못했던 탓일까. 누군가에게 너무나 지겨운 일상을 부러워한 아무것도 아닌 무언가의 생각은 어쩌면 저 활활 타오르는 연탄인지 숯일지 모른 저 무엇보다 못한 것일까.
24시 영업이라고 쓰인 그 가게의 그것들은 지금도 타오르고 있겠지. 쉴 틈도 없이 그것들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나는 그것들을 부러워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것들을 불쌍해야 하는지.
하지만 부러웠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을까. 누군가를 위해 쓸모가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해 나는 그것에 대해 약간의 질투와 시기심을 느꼈기에 그러하지 않았을까. 불과 그것에 불과한 그것에 대해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는 것은 내가 좀 더 나아지고 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으니까.
어쨌든 그것들은 자기가 주어진 역할을 지금도 하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계속 이어질 테니.
https://youtu.be/j_MlBCb9-m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