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불태우지 않는 지혜에 대하여
다리는 사이에 놓인 장애물을 뛰어넘어 장소와 사람을 연결합니다. 그렇기에 때때로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적인 관계일수도 있고, 공적인 관계일 수도 있습니다.
"Don't burn down the bridge."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관계를 불태워버리지 말라는 뜻인데요. 모든 관계를 유지하라는 뜻은 아니고, 돌이킬 방도가 없을만큼 관계를 망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관계는 소통과 상호존중에 의해 쌓아올려지고, 신뢰에 의해 유지됩니다. 유지를 넘어 관계를 개선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노력과 희생도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관계가 소중하다는 점에는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갈등이 생기면 관계를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함께 지켜온 모든 유대감이나 연대감을 전부 잘라내면서요. 이런 일은 한순간의 충동에 의해서 일어나기도 하고, 오랜 결심에 의해서 일어나기도 하는데요. 결심이라고 해서 충동보다 더 알아채기 쉬운 것도 아니며, 더 정당한 것도 아닙니다.
관계를 불태우는 것. 인생을 돌아보면 사적인 관계에서는 방화(放火)가 불가피했다고 생각해온 순간들이 있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사사로운 일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싶지 않아 불가피했다는 변명을 댔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조금은 들지만, 여전히 사적인 관계에서는 하나의 선택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혜롭지는 않더라도요.
그러나 공적인 관계에서는 다릅니다. 공적인 관계는 결코 불태워서는 안 되며, 애초에 방화가 하나의 선택지여서도 안 됩니다. 흔히 관계를 '손절한다'고 표현하는데요. 공적인 관계를 불태우는 것은 레버리지까지 끌어와서 손절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이 글에서는 공적인 관계, 특히 직장에서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이때 상대는 보통 당신의 회사나 상사가 되겠죠.
첫번째는 분노입니다. 상대가 공을 가로채서, 잘못에 대한 책임을 떠넘겨서, 일방향의 이해와 희생만을 요구해서, 업무에 방해가 되는 문제를 방치해서, 노력에 비해 성과는 없는 업무만 주어져서, 사적인 영역까지 침범해서 등이 계기가 됩니다.
두번째는 실망입니다. 상대가 당신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아서, 신뢰나 인정이 부족하다고 느껴져서, 연차에 맞는 기회를 주지 않아서, 계획 실행을 차일피일 미뤄서, 처우가 부적절하다고 느껴져서, 약속한 일을 지키지 않아서 등이 계기가 됩니다.
실망과 분노로 사람들은 더이상 상대와 일할 수 없다고,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많은 공적인 관계의 종식은 구조상 개인보다는 회사에 의해, 부하보다는 상사에 의해 촉진됩니다. 결국 라이터를 빼드는 주체는 그 반대지만요. 다른 두 이유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세번째는 회피입니다. 해고당할 것 같아서, 승진에 실패할 것 같아서, 상대에게 큰 손해를 끼쳐서, 고객을 잃을 것 같아서, 업무가 많아질 게 확실해서, 사내 정치에 실패해서, 커리어를 망칠 것 같아서 등 앞으로 일어날 불행을 회피하고자 선제적으로 불을 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네번째는 착각입니다. 당신이 필요하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냐, 조금만 더 있어달라, 처우를 올려주겠다, 업무를 조정해보자 등의 상대가 쏟아내는 말을 뒤로한 채 모든 관계를 불태워버리며 자신이 상대와 상황,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관계를 불태우는 행위는 보통 회사와 조직과의 갈등이나 그들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됩니다. 때문에 대부분 탑다운이 아니라 바텀업으로 발생합니다.
성인에게 갈등을 조정하고 타인과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능력은 감정적으로 성숙했다는 증표입니다. 내가 겪고 있는 문제를 정확히 정의하고, 회사 또는 상사와의 충분한 소통을 통해 합의점을 찾아보는 것이 가장 처음 해야 할 일입니다. 끝내 답을 찾지 못했을 때는 역시 프로페셔널하게 마무리하면 되는 것이구요.
그러지 않으면 결국 주변 모든 이들에게 감정적으로 미성숙한 아마추어가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억울한 일을 당했건, 부당한 처사를 견뎠건 간에, 남들 눈에 보이는 것은 이미 남김없이 타버린 다리의 잔해뿐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화상을 입은 것처럼 계속 떠오르는 나쁜 기억은 덤이죠.
관계를 불태우는 것이 부정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가장 속 시원하고 간편한 방법이라 할지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 대가는 너무나 큽니다. 우리는 상대의 지지와 조언, 그리고 혹시 모를 기회를 얻기 위해 공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항상 그럴 수는 없겠지만, 대개 문제를 공표하고 합의점을 찾으면 관계를 더욱 돈독히할 수 있습니다. 갈등은 관계 속의 일부라는 것을 늘 인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방적으로 관계를 불태우는 것은 우리를 고립시키고 외톨이로 만드는 일입니다.
사실 글을 쓰는 저도 불을 다 질러놓고 아차 싶어 황급히 불을 끄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심지어 늘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하는데도요. 조금씩 귀퉁이부터 타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면 어느새 큰 불이 되어있곤 합니다. 당신이 관계를 불태우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리기 힘든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번째는 감정적인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관계를 불태우는 이들은 대부분 화나고, 실망하고, 상처 받는 등, 감정적으로 힘든 상태입니다. 따라서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상태를 유지하기가 힘들며, 우리의 판단력을 흐리게 합니다.
두번째는 자기 인식의 결여입니다. 당신의 행동이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휩쓸리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상대에게 방어적이고 관대하지 못한 상태가 되어버리며, 이것이 관계를 망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합니다.
세번째는 잘못된 정당화입니다. 당신의 행동이 옳고 필수적인 것이라고, 정당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심지어 그런 행동들이 지금까지 맺어온 관계나 앞으로 있을 기회를 완전히 날려버리는 것이라도요.
그러면 어떻게 관계를 불태우는 순간 알아채고, 더 이상의 파괴를 막을 수 있을까요? 점검해야 하는 몇 가지 사항을 정리했습니다.
첫번째 신호는 소통을 줄이는 것입니다. 당신은 소통을 줄이는 방식으로 상대방과 당신 사이에 놓인 다리에 빗장을 걸어버립니다. 좌절이나 절망을 불러일으키는 상대의 연락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회신을 늦추어 불만을 표명합니다.
두번째 신호는 존중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당신은 상대방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기 시작하고, 그 사람의 성취나 업적을 깎아내립니다. 상대에게 모욕감을 주고 화를 내는 것이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세번째 신호는 협상의 포기입니다. 당신은 유화적이고 건설적인 대화를 거부하고, 증오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파괴적인 대화 환경을 계속해서 조성합니다.
네번째 신호는 좋았던 기억의 반전입니다. 상대방과의 좋았던 기억이 오히려 당신을 배신감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심화시키고, 상대를 다시는 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에 빠뜨립니다. 관계를 한순간에 불태우는 방식으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다섯번째 신호는 가장 억울한 기분입니다. 당신은 너무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했기에 무슨 말이든 해도 된다고 느낍니다. 심지어 당신을 그런 상태에 빠뜨린 상대방에게 이런 행위를 통해 당신이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줄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미래에 관계를 불태우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주기적인 점검이 필요합니다.
감정을 알아차리세요. 당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그 감정이 당신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주의를 기울이세요. 만약 당신이 화나고 상처 받은 상태라면 한 걸음 물러서서 그 행동의 여파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세요.
피드백에 귀 기울이세요.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들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세요. 누군가 당신의 행동이 관계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하면, 그들의 피드백을 신중히 받아들이고, 당신의 행동을 돌아보세요.
반드시 책임을 지세요. 당신의 실수을 깔끔하게 인정하고, 이미 행한 일들과 결과에 대해 어른스럽게 책임을 지세요. 필요하다면 상대방에게 정중히 사과하고, 관계 회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세요.
지금까지 관계를 불태우는 것이 왜 현명하지 않은지, 특히 공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저도 심적인 여유 없이 일에만 매몰되어있을 때는 급발진하는 제 모습이나 행동에 놀라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관계가 불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이면 늦지 않게 발화점을 찾아 불을 끌 수 있습니다. 관계를 불태우는 행위로 얻는 이점은 일시적이며,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실질적인 이점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늘 기억합시다.
힘들더라도 상호존중을 잃지 않고, 먼저 소통을 시도하며, 갈등 상황에서는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프로페셔널한 모두가(사실 제가) 되길 바라며 긴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