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TV 채널을 돌리다 보니, 한국인의 밥상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어느 할머니가 게국지를 끓이고 있었다. 보글보글 끓는 찌개에서 한 수저 간을 본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향해, “밥 먹어야겠다” 라고 했다. 그 말이 얼마나 멋지게 들리던지! 당연히 할아버지가 미리 준비한 접대성 멘트는 아닐 것이다. 그저 간이 잘 된 찌개에 밥 한 수저 생각이 들었을 뿐인데, 그것보다 맛있다는 칭찬이 어디 있겠는가! 준비했을 리 없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기막힌 표현들에 가끔 귀가 번쩍 뜨일 때가 있다. 차지고 명쾌한 문장들이 유행어처럼 귀에 감긴다.
얼마 전, 마을버스를 타고 가는데 뒷좌석에 있는 할머니 두 분의 대화가 들렸다. (목소리가 커서 나뿐만 아니라 버스 안의 모든 사람이 들었겠지만) 두 분은 처음 만난 듯했다.
“어디까지 가슈”
“나, 저기 장보러”
“나는 병원 가는 길이유, 무릎이 아파서. 작년에 넘어진 이후로는 앉은 자리가 내 자리야”
앉은 자리가 내 자리야.
나는 그 표현이 참으로 시적이라고 느꼈다. 참으로 슬픈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청산유수로 흘러나오는 고생담은 몇 번이고 연습해서 완벽하게 외운 대사처럼 리듬감 있게 들렸다. 어르신들의 문장은 가끔 그렇게 들린다. 칭찬이고 불평이고 할 것 없이 대단할 것 없는 단어들로 신선한 충격을 준다.
그에 비해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얼마나 진부하고 부질없는지. 우와, 맛있다, 라는 말에 “정말?”하고 되물으면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맛있다고 하고 싶은데 이상하게 말할수록 진심과 다르게 칭찬들이 허공에 떠돈다. 불필요하게 첨가하는 조미료처럼 그저 사족이 되어 버린다.
저녁을 들며 펠튼 씨는 베넷씨의 딸들의 미모에 감탄을 연발한 후 드 버그 부인에 대한 찬사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그 후 저녁식사에 나온 음식과 홀, 식당, 가구 등을 차례로 칭찬했다. 베넷씨는 펠튼씨에게 칭찬에 아주 능숙하다고 말해주었다.
“칭찬이 즉흥적으로 생각나는 편인가? 아니면 연구해서 나오는 건가?”
“주로 집에서 연습합니다. 그렇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들리도록 노력하지요. 칭찬은 아주 유용한 거니까요.”
펠튼 씨가 말했다.
영화 “오만과 편견”의 이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특히 좋아한다. 눈치 없는 펠튼(콜린스)씨는 질문이 그를 비꼬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진지하게 자신의 어리석음을 역설한다.
하지만 그에게 동정심이 가지 않는 것은 그의 어리석음이 순수하거나 무지해서가 아니라 거만한 자기애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칭찬해주면서도 그 방향은 자신에게 있다. 얼마나 자연스럽게 연습한 칭찬을 능숙하게 해내는가! 그것은 준비된 음식과도, 칭찬을 받는 상대와도 상관없다. 급하게 매치된 것들뿐이다. 그래서 화려한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칭찬을 받는 사람은 아무런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 결국 그 “노력”이라는 것도 옆에서 보는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말지만 본인에게 집중하고 있는 그는 그마저도 깨닫지 못한다.
많이 배웠다고, 책을 더 읽었다고 더 마음에 닿는 칭찬을 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TV의 수많은 요리 프로그램과 홈쇼핑에서 사용되는 화려한 형용사들과 부사들도 진정 할아버지의 “밥 먹어야겠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와 같은 것은 없다.
명절 때 엄마가 만든 요리들을 한 상에 차릴 때면, 차리는 동안 누가 먼저 먹거나 하지 않고, 먼저 할아버지가 기도를 해주시고 나 후, 다같이 수고한 엄마에게 박수를 치면서 잘 먹겠습니다 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 때가 그렇게 좋다.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야 칭찬도 나오는 것이다. 그 박수에는 형용사도 부사도 없다. 모두가 우리 집 특제 양념게장을 먹으며 맛있다고 한마디씩 하지만 그 말보다 손가락을 쪽쪽 빨며 바쁘게 움직이는 손과 입이야말로 기분 좋은 칭찬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담아 박수를 친다.
우리가족에게 그것은 말 주변이 좋거나 나쁜 사람이나, 칭찬이 쑥스러운 사람이나 누구나 동참할 수 있는 순간이다. 나는 그 시간이 좋다. 뿌듯해져서 엄마를 바라보고 함께 박수를 치며 말한다.
“잘 먹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