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봉보로봉 Apr 29. 2016

예쁜 잔

모두가 똑 같은 속도로 가지 않아도 된다고 진심으로 말하고 싶다

일러스트@황인정


한약을 예쁜 잔에 넣고 데우면 좀 덜 쓸까?    

말도 안 되는 소리겠지만, 한약을 데울 때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쓴 맛은 정말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쓰다 써.     

집에서 피자를 시켜먹어도 와인 잔에 사이다를 따라 먹는다. 무 피클을 담고, 초 한 두 개를 켜고 와인잔만 있으면 TV를 보며 먹어도 특별한 식사가 된다. 밥공기가 아니라 유리로 된 타원형의 오븐 용기에 밥을 담아놓고 덜어먹는 것도 좋아한다. 큰 접시를 하나씩 주고 이것저것 덜어먹으면 설거지 거리도 줄어들지만 요리를 담은 접시가 이곳 저곳으로 옮겨가고, 서로 덜어주기도 하고,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조금씩 움직이면서 사이가 각별해지는 것 같다. 그런 풍경에 대한 동경이랄까, 밥 먹기도 전에 흥분상태가 된다. 그래서 점점 더 그릇이, 잔이 신경 쓰인다. 요리보다 그릇에 눈이 먼저 가기도 한다.

    

어릴 땐, 여성스러운 걸 지나치게 싫어했다. 6학년 때 피아노 발표회에 나갈 때도 꼬마들까지 모두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하는데 나는 그 돈이면 정장 원피스를 사겠다고 했다. 사진에는 모두 턱시도와 드레스. 한 쪽 구석에 원피스를 입은 나와 여동생이 있다. 딸들을 예쁘게 꾸며주고 싶은 엄마는 여간 속상한 게 아니었다고 한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예쁜 잔” 타령을 하고 있다.     


신혼시절에도 그릇이나 잔이 예쁘다는 생각을 못했다. 관심도 없고 안목도 없어서 비싼 물건이나 싼 물건이나 똑같이 보였다. 그 때 우리가 신혼 집을 도쿄의 5평짜리 원룸으로 구하지 않았다면 자칫 나는 취향도 안목도 없이 아주 많은 돈을 아파트를 채우기 위해 써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백화점에 구경가면 심심찮게 들렸던 “그래도 신혼인데 화사하게”라는 말에 익숙해져서 나도 꽃무늬 벽장이며 비싼 식기를 세트로 사놓고 개운치 않은 마음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 때는 100엔 샵에서 플라스틱 식판을 몇 개 사는 걸로 충분했다. 둘이서 함께 음식을 해먹는 다는 것만으로도 소꿉장난하는 것 마냥 즐겁기만 했다. 둘이 같이 쇼핑을 하고 마트에 가는 것이 데이트가 되니까 그 때 그 때 필요한 것을 하나 둘 사는 게 오히려 좋았다.   

지금은 내 눈에 띄는 것도 있고 갖고 싶은 스타일의 식기도 있고 그릇 고르는 것이 즐겁다.     


이제야 조금씩 관심이 생긴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다행스럽게 여긴다.   

인생도 결혼생활도 길다. 나는 운이 좋게도 적당한 때에 안목도 관심도 생기는 것 같다. 돈을 많이 벌지 못할 때 좋은 가방이 갖고 싶고, 좋은 물건을 알아보는 안목이 생겨버리는 것도 괴로운 일이다.     


결혼 8년 차에 거실용 큰 소파를 샀다. 둘 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타이밍이 맞았다. 8년 전에는 소파에 이렇게 큰 돈을 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지만(결제할 능력도 안되고), 지금은 충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결제할 수 있는 경제력도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사면서 고민도 없고 납득이 되고 예산도 세울 수 있다.     


신혼이면 당연히 이 정도는 해야지, 라고 비싼 물건들을 당연하게 여겼다면 사지 못할 때 속상하고 서러웠을지 모르겠다. 수준에 맞지 않는 걸 바라보고 기대하고, 주위와 비교하며 시작부터 불만으로 가득한 신혼처럼 불행한 것도 없을 것이다. 무식할 정도로 주위를 보지 않고 시작한 그 때를 진심으로 다행으로 여긴다.     


예전에는 꽃 무늬라면 무조건 질색 팔색. 하지만 지금은 “예쁜” 꽃무늬면 좋다. 오케이. 여지를 두고 기회를 준 달까? 기념품 컵에 환장한다고 놀림 받을 정도이지만 나라 이름만 써놓았다고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조잡하고 대충 만든 것들은 싫다. 어떤 것이든 세련되고 예쁜 것이 좋다.  

그 기준은 각자 다르겠지만.    


맘에 드는 잔을 앞에 두고 글을 쓰면 더 잘 써질까  

확실히 스탠드를 마음에 드는 것으로 바꾸고 나는 책상 앞에 앉는 것이 더 수월해졌다. 부족한 실력과 재능이 까발려지는 책상 앞에 앉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미루고 도망하고 싶다. (붙잡는 사람도 없으니 도망치기가 더 수월하다) 그렇게 미루다 하루가 가고 주말이 온다.  

스탠드의 각도가 맘에 들고 탁 켜지는 소리와 스위치 위치도 기분 좋다. 종이는 가리지 않아서 a4이면지에 쓰고 있다. 커피나 차, 간식을 먹어야지, 라고 생각하는 4시쯤을 기다린다. 밤에는 스탠드와 머그컵, 그리고 내가 앉아 있는 의자가 가장 중요하다. 그러니까 맘에 드는 머그컵이라면 스탠드만큼 기분 좋게 나를 도와줄 수 있다.   

적어도 커피를 타서 의자에 앉은 것을 수월하게 (저 컵을 써야 하니까) 해준다.   

그리고 적어도 한약을 꺼내는 일 자체를 수월하게 (저 컵을 써야 하니까) 해준다.    


신혼에 이 정도는 해야지 라고 모두 똑같이 정해져 있다면 참으로 재미없다. 없는 것들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시선도 불필요하다. 각자 자기 템포대로 가면 된다.   

우리는 꽤 비싼 오피스텔에서 살기도 하고 전철이 없는 지역에서 살기도 했다. 일반적인 부부가 가는 길에서 벗어나 있다고 이런 저런 우려의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우리의 상황에 따라 필요한대로 결정한 것이다. 누구에게 보이기 적합하고 단번에 이해 가능하지 않아 좀 불편하다고 해서 체면 때문에 비슷하게 고르다가는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집은 고를 수 없다.     


나는 모두가 지금 집을 사둬야 한다고 말하며 만날 때마다 어깨와 등에 짐을 가득 지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빚 이야기만 하느니, 모두가 똑 같은 속도로 가지 않아도 된다고 진심으로 말하고 싶다. 집을 사는 것도 아기를 갖는 것도 소파를 사는 것도 모두, 시기도 상품명도 정해진 적 없다.    


맘에 드는 잔에 뜨거운 물을 담고 한약을 데우다 보면 내 맘이다, 내 맘이야, 라고 종종 생각하게 된다. 이런 나 때문에 나중에 거지꼴을 못 면할 거라고 남편은 투덜대기도 하지만 인생도 결혼생활도 길답니다.   

쟁여놓지 않아도 되니까 안심합시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바웃해장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