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솔라리스의 바다 Mar 12. 2024

봄 이야기

슬라이딩 퍼즐처럼 어긋나는 사람들

오늘 하필이면 왜 <봄 이야기>(에릭 로메르, 1990)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에릭 로메르의 사계절 연작 중에서 가장 늦게 본 영화이고 가장 무덤덤하게 본 영화였는데 말이다. 

이건 다른 얘긴데, 에릭 로메르 영화의 주인공들은 여름 휴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내가 처음으로 에릭 로메르를 만난 건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다. <여름 이야기>(1996)를 봤다. 여름의 해변을 배경으로 한 가벼운 코미디. 두 여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모두를 잃는 남자 주인공이 안 됐기도 했고 쌤통이기도 했다. 사실은 풋풋했다. 누군들 바보일 때가 없었을까.


그다음으로 본 영화는 <겨울 이야기>(1992)다. (아마도 낙원옥상 시절의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봤을 것이다) 주인공의 순애보 같은 사랑이 답답하다가도 영화의 마지막에 말도 안 되는 우연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러고 나서 가을에 <가을 이야기>(1998)를 봤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에릭 로메르의 영화. <가을 이야기>는 가을과 산책과 기다림 그리고 여백의 영화다. 가을에, 텅 빈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나와서 걷는 종로의 길이 맛있었다. 달빛도 좋았고. 


<봄 이야기>는 가장 나중에 봤는데, 그렇게 재밌지 않았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남자친구의 부재, 머물 공간의 부재, 아빠의 부재, 엄마의 부재. 계속해서 부재한다. 그리고 모두 남의 집에 머무는 것 같다. 남자친구는 주인공에게 집을 놔두고 여행을 가고, 주인공은 사촌에게 자기 집을 빌려주고. 파티에서 만난 아이는 아빠가 출장 간 집에 주인공을 머물게 하고. 마치 슬라이딩 퍼즐을 하면서 부재 증명을 하는 외로운 사람들을 그린 영화 같았다. 


<봄 이야기>를 보기 전에는 어떤 기대를 했던 것 같다. 다른 계절 연작만큼이나 재미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자꾸만 어긋나는 영화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주인공에게 감정이입도 되지 않았다. 


오늘 <봄 이야기>가 생각났다. 왜인지 모르겠다. 많고 많은 에릭 로메르 영화 중에서도 <봄 이야기>를 생각하는 경우는 없었으니까. 아마도 봄이기 때문일까? 현실의 어딘가에서 계속 미끄러지고 있기 때문일까? 잠시 졸고 일어나 무거운 머릿속이 차츰 정리되면서 나도 모르게 솔직해진 걸까? 확실히 <봄 이야기>는 가벼운 미열을 앓고 난 뒤,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같은 영화이긴 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시간의 질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