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왜 희망이 필요한가

만화 울기엔 좀 애매한 - 최규석

by 장광현

둘리 2003(영원한 어린이의 친구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이란 만화가 있습니다. 국민적 사랑을 받은 김수정 화백의 둘리를 오마주한 만화로 그 당시에는 낯선 이름이었던 최규석 작가의 데뷔작입니다. 우스갯소리로 고길동이 불쌍해 보이면 나이가 들은 거라는 얘기가 있었습니다만 작가는 이 농담에서 몇 걸음 더 나아가 과감하게 원작을 비틀었습니다. 왜 그런 건지 둘리를 일용직을 전전하는 중년으로 묘사하고, 함께했기에 행복했던 둘리의 친구들을 인생의 바닥에서 허덕이는 천덕꾸러기로 변모시켜 독자들이 갖고 있는 둘리의 추억을 무참하게도 구겨버렸습니다. 일말의 희망적인 요소를 기대해봐도 보란 듯 새드엔딩으로 마치는 어두운 리얼리티에 작가는 몹시도 공을 들였습니다. 그림을 보자마자 숙련도가 바로 느껴질 정도로 잘 훈련된 작가가 세상에 선보이는 첫 작품이 이리 비관적이라니요. 만화를 보는 내내 느껴지는 불편함과 고통스러움이 작가가 의도한 장치라는 생각에 읽는 동안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이 또한 삶의 한 모습이기에 작품의 메시지를 이해하려 끝까지 페이지를 넘겨 봅니다. 프레스기에 손가락이 잘려 더 이상 마법을 못 부리는 둘리, 매춘을 하는 또치, 폭력으로 교도소를 전전하는 희동이, 사기꾼 도우너 등 작가는 중간을 모르는 듯 극단까지 만화를 이끌고 가 끝엔 둘리마저 쓸쓸한 죽음을 맞게 합니다. 방점으로 죽은 둘리를 실제 공룡의 모습으로 묘사한 것이 작가의 가혹함을 더 돋보이게 했달까요. 만화는 컷마다 빈틈없이 슬픔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후 한동안 작가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는데 네이버 웹툰으로 연재되었던 송곳으로 최규석 작가의 귀환을 알게 되었습니다. 2006년에 있었던 까르푸 사태를 기반으로 한 다소 무거운 소재의 작품이었는데 알맹이가 있는 이야기의 흡입력 덕인지 드라마로도 제작이 되어 성공을 거뒀습니다. 작가는 비정규직 차별 및 노동 문제를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사회정의가 무엇인지 가볍지 않은 질문을 던졌으며, 차기작으로 지옥이라는 웹툰을 통해 초자연적이며 종말론적인 세계관으로 작품을 보는 이에게 다른 듯 같은 질문을 이어나갔습니다. 돼지의 왕과 부산행으로 유명한 연상호 감독과 손을 잡은 최규석 작가는 성공가도를 질주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송곳과 마찬가지로 지옥은 처음의 주목도와는 다르게 내용이 진행될수록 화제성에서는 멀어져 갔습니다. 그 이유가 확연해 보이지만 작가는 아는지 모르는지 고집스레 변함없는 그만의 이야기를 이어나갑니다. 최근 카카오 웹툰에서 연재되는 계시록을 보아도 작가의 의지는 확고해 보입니다. 아마도 그의 지지자이자 조력자인 연상호 감독을 만나 그의 펜에는 날개가 달렸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작가는 흑백의 모노톤으로 만화를 그려 자신의 어두운 세계관을 최적의 방식으로 드러냅니다. 그가 내놓는 작품마다 보이는 현실의 부조리함은 간간이 이어지는 개그로 승화시키기엔 무척이나 절망적입니다. 초기작인 대한민국 원주민을 통해 그의 성장과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면 습지생태보고서와 울기엔 좀 애매한으로 그의 청년기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습지생태보고서의 궁상맞고 설익은 개그보다는 울기엔 좀 애매한이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더 가감 없이 해석할 수 있는 좋은 작품으로 보입니다.


주인공 원빈은 이혼 후 혼자서 식당을 차린 엄마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평소 미술을 좋아하며 소질도 있지만 형편상 학원을 다닐 엄두도 못 냅니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요, 엄마는 사랑하는 아들의 소원인 애니메이션 전문학원을 보내주기로 합니다. 주인공은 미술학원에서 괴짜 강사와 다양한 개성을 가진 친구들을 만나게 됩니다. 강사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상은 경험에서 나온 듯 매우 사실적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입시의 중압감을 유머로 버텨나가는 학생들의 모습이 재미있게도 보이지만 실상은 재미로만 끝나지는 않습니다. 과장도 있겠지만 내부에서 벌어지는 비리와 실력을 갖췄어도 학비 마련을 못해 진학을 포기하는 등 아직 주변에 있을법한 안타까운 이야기에는 페이지가 잘 안 넘어가기도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작가 최규석 내면의 조각들로 보입니다.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작가는 바뀌지 않는 현실을 가면극의 말뚝이처럼 조롱합니다.


"내가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야, 우리 학원에서 만화반 애들이 제일 거지잖아~만화는 너희 또래 아이들 대부분이 좋아하고 싸게 접할 수 있는 장르야. 근데 왜 유독 가난한 애들이 만화를 직접 그리겠다고 나서냐 이거지."


"정선생 실력 좋잖아요~중학생 그림 한 장 갖고 뭘 그리 진을 빼고 있어요?"

"저보고 대신 그리란 얘기밖에 안 되잖습니까?"

"정선생 월급 누가 줘요? 학원 안 다니는 애들이 월급 줘요?"


작가는 기자 같은 사명감으로 만화를 그리는 걸까요. 그의 작품이 사회의 부조리, 인간에 대한 절망, 비루한 현실 같은 삶의 어두운 면을 다룰수록 작품은 시작과는 다르게 대중과는 점점 멀어져 갑니다. 물론 세상이 엉망인데 작품이 아름답기만 하다면 작가는 대중을 기만하는 거겠죠. 하지만 우리가 매체를 선택하는 이유는 꽤나 분명합니다. 뉴스를 통해 얻고 싶은 것과 엔터테인먼트를 통해 얻고 싶은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잠시 프랑스를 예로 들면 나라는 만화조차 너무나 예술적입니다. 위대한 예술의 역사를 가진 나라답게 리얼리즘 작품도 많으며 사회고발 기능에도 뛰어난 작품이 넘쳐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만화 작가를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앙굴렘 만화 페스티벌 정도까지 관심을 갖지 않는 이상 어려운 일이죠.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안 그래도 복잡하고 힘든 일상에서 만화에서까지 프랑스식의 고단함을 느끼려는 독자는 점점 줄어들고 픽사와 일본식의 즐길 거리가 풍부한 만화로 수요가 몰리는 것이 그 이유가 될 것입니다.


저는 어느 곳에서라도 희망을 보고 싶습니다. 또한 인간에 대한 실망의 연속인 일상에서도 유머를 잃고 싶지 않습니다. 저 역시 삶의 굽이 굽이에서 절망을 무수히도 마주했지만 희망을 잃었다면 진즉 모래성처럼 무너졌을 거라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합니다. 우리는 희망을 전보다 많이 이야기해야 합니다. 비난이 세상을 바꾸리라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대중의 인기로 사는 작가들도 책임이 있다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작품에 개연성 없는 ppl 같은 희망이 아니라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작가의 작품관을 비판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장르에 대한 몰이해로 인한 덜 떨어진 리뷰도 아닐 겁니다. 다만 늘 투덜대며 무리에서 떨어져 있던 사람이 같이 어울리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한 번쯤은 보고 싶다는 마음일까요. 그간 치열히 달려왔던 그의 작품에 한 번 정도는 밝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만화를 보고 싶은 팬심으로 짧은 글을 적어 보았습니다.


일조량이 풍부한 나라의 예술이 더 밝다지요. 우리나라는 이미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는 아닌 것 같습니다. 글을 쓰는 지금도 땀이 뚝뚝 떨어지는데 곧 추워질 것을 대비하라는 겨울 옷 광고가 휴대폰을 울립니다. 여름 아니면 겨울인가요. 뜬금없지만 떨어뜨린 잉크로 혼탁해진 물 잔을 깨끗하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답은 지속적으로 깨끗한 물을 부어주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