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운 상상력

오민혁 단편선 - 화점

by 장광현

지금과는 다르게 제가 어릴 적 TV 채널에는 선택지가 몇 없었습니다. 우습게도 제가 가장 즐겨보던 채널은 주한미군 방송인 AFKN이었습니다. 평일 저녁에는 어린 저에게는(당연하게도) 채널 선택권이 없었고, 늦은 밤에나 주말에 권력의 공백을 이용해 TV를 틀면 제 눈을 사로잡는 채널이 주한미군 방송 하나뿐이었으나 그 시기가 참 재미있던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물론 SBS도 개국하고 스카이라이프라는 위성방송이 생겼으나 조금은 훗날의 얘기이고, 당시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엄청났던 WWF레슬링과 NBA농구를 AFKN에서만 중계해 주었기 때문에 화질이 좋지 않더라도 안테나를 고쳐 세우면서 미국의 화려함에 자발적인 무방비로 매료되었던 게 기억이 납니다. 아마도 7080 세대의 절대다수는 할리우드 키드들이 아니었을까요. 뜬금없이 사적인 추억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 신산했던 시기에 우리와는 달리 압도적인 자본을 바탕으로 한 할리우드의 상상력과 화려함에 많은 사람들이 빠져있던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AFKN에 홀려있던 제가 자연스레 국내 채널을 보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SBS 개국 후 방송사 콘텐츠의 부족 탓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명 시리즈를 수입하여 방영하였던 일이 그 시발점이 된 것 같습니다. 후에 국내 채널에서 방영한 다양한 미국의 드라마를 가리지 않고 보았으니 당시의 저는 무비판적으로 미국의 문화를 동경했던 게 아니었나 싶은데 가장 좋아했던 시리즈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환상특급이었습니다. 후에 알고 보니 의역된 제목이고 원제목은 어메이징 스토리였네요. 그 당시에도 이미 스필버그는 E.T라는 귀여운 외계인을 등장시켜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훔친 놀라운 감독이었으나 제 어린 날의 감상으로는 환상특급이 E.T보다 훨씬 흥미로우며 다음 주까지 목이 빠질 것 같은 기다림을 주는 기쁨 그 자체였습니다.

늦은 밤 커피 및 간단한 야식을 파는 가게에서 술 취한 손님의 소원을 들어주고, 길거리 골동품 가게에서 산 램프가 마법을 부리기도 하며, 골드러시 시기에 지하에 판 갱도에서 정체 모를 존재들과의 보물 거래 이야기 등 여러 에피소드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걸 보니 지금도 저는 스필버그를 첫사랑처럼 기억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모처럼 오후에 여유가 생겨 도서관에 들렸습니다. 읽고 싶은 책을 찾는 일은 소풍 말미에 있는 보물 찾기처럼 늘 옅은 기대와 흥분이 있습니다. 숨어있는 보물 같은 책을 찾던 중 눈길이 가는 제목이 보여 손을 내밀어 책을 꺼내 보았습니다. 슬쩍 보니 책의 모서리에는 검은 바탕에 투박한 하얀 글씨로 제목이 툭하니 인쇄되어 있습니다.


오민혁 단편선 - 화점


저에겐 낯선 이름이기에 더 호기심이 갔다고 할까요, 책을 집어 들고 찬찬히 첫 장에 기록된 작가의 약력을 보았습니다. 2015년에 네이버 웹툰에서 같은 제목으로 연재를 했으며 현재는 장편을 준비 중이라는 단출한 글. 펼쳐보니 구성은 총 6편의 단편 모음집이며 그림을 보자마자 단순하지만 군더더기 없는 묘사의 작화를 보니 역시나 제 취향에 맞아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어서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서두르고 싶었지만 사서분께 가벼운 인사 후 대여한 책을 천천히 테이블로 가져가 조용히 앉았습니다. 잘 차려진 정식을 먹을 때처럼 차분한 자세로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괜히 코를 만지작 거리고 눈썹을 긁적이는 사이 금세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게 되었습니다. 문득 드는 어색한 기분에 시계를 쳐다보니 시간이 30분밖에 안 지났더군요. 장황한 상황 묘사지만 화점이라는 책을 묘사하기 위해 느낀 바를 생각해보니 이보다 적절한 설명이 없는 것 같습니다. 화점은 작가의 그림만큼이나 내러티브에도 군살이 없습니다.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위해 이 만화는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일정한 호흡으로 독자를 이끌어 나갑니다. 짐작하시겠만 이 책은 어린 시절 제가 열광했던 환상특급과 닮아 있습니다. 오롯이 상상력에 의존해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는 픽션으로 오민혁 작가의 만화는 마치 영상처럼 눈앞에서 유려하게 흘러갑니다. 세부적인 스토리를 보면 바둑기사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후 교만했던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끼던 주인공이 돌아가신 스승과 바둑 한 판을 나누는 화점, 미래에 벌어질법한 휴머노이드와의 사랑을 다룬 달리와 살바도르, 6.25 전쟁을 겪고 남북으로 갈라지게 된 두 친구 비행기 조종사의 이야기 아이스크림, 도박운에 목숨을 거는 도박중독자 룰렛, 거대한 우주 속 외로움을 기괴한 상상력으로 엮은 매듭, 사랑하는 자녀가 죽고 난 후 방황하는 축구선수의 이야기 우주어까지 작가는 제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 시절 그때의 방식으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나갑니다. 장르의 특성상 아이작 막시모프 같은 SF의 거장도 떠오르나 스필버그가 먼저 떠오르는 이유는 이미지가 갖고 있는 힘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텍스트를 대신해 화면을 구성하고 연기를 통해 상황을 설명하며 스토리의 기저에는 늘 인간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 스필버그처럼 오민혁 작가는 만화를 컷으로 나눠 자신의 상상력과 이 장르에 대한 애정을 독자들에게 설명합니다. 그리고 설득에 성공합니다. 다시 예전 그때처럼 내가 만든 환상특급을 즐기지 않을래 하고 말이죠.


일본의 기묘한 이야기 시리즈나 스티븐 킹, 베르나르 베르베르 등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들도 떠올랐습니다. 인상적인 순서보다 읽었던 시점을 따라 기억이 나는 것을 보니 많이 어렸던 그 시절과 SF에 탐닉해 친구들과는 조금은 다르게 엉뚱했던 저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공부하는 형 누나들 사이에서 떡하니 소설책을 꺼내놓고 사뭇 진지한 자세로 두꺼운 책을 읽었던 어린아이가 우습기도 하지만 돌이켜보면 저는 항상 무언가에 빠지지 않고서는 시간을 보낼 수 없는 사람이었나 봅니다. 그 시절이 그리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제가 행복했던 시기를 추억하는 중요한 키워드에 순수 또는 열정이 붙어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 싶습니다. 다들 종류와 시기만 다르지 그런 시절을 보낸 적이 있을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SF작가들의 상상력은 알면 알수록 놀랍습니다. 과거에 책으로나 가능해 보였던 일들이 실제로 이뤄진 것들을 보게 되면 마치 예언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의 통찰력들이 종종 보이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집니다. 왜인지 하위 문학 장르로 구분되어 제대로 된 조명을 받지 못하더라도 묵묵히 상상의 계보를 이어 나가는 작가들을 발견하게 되면 고마운 생각이 듭니다. 다행히 요즘엔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매우 커져 영화화되는 소설과 만화들이 많기에 너무 예전의 사고로 얘기한 것 같기도 하네요. 오민혁 작가는 충분히 그 대열에 설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차기작을 기대하게 만들죠.


늦은 밤에도 짝을 찾는 매미가 목이 터져라 서럽게 우는데 긴긴 여름밤을 어떻게들 보내시나요. 네이버 웹툰으로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오민혁 작가의 화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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