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완벽하지 않아도 계속 움직일 수 있는 이유

일의 흐름을 지키는 마음에 대하여

by 김태길

디자인 일을 시작한 초반에는 완벽이라는 단어가 무척 선명하게 보인다.


화면을 조금만 더 깔끔하게 만들면 좋을 것 같고, 문장을 조금만 더 매끄럽게 다듬으면 더 정교해질 것 같고, 컴포넌트 구조를 한 번 더 정리하면 훨씬 설득력 있는 결과물이 나올 것 같은 기대가 자연스럽게 생긴다. 완벽은 손을 조금만 더 뻗으면 닿을 것처럼 보이는 목표이고, 그 목표를 향해 시간을 더 쓰는 것이 성실함의 증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디자이너들이 초반에는 완벽을 기준으로 일의 속도를 조절하려 하고, 완벽에 가까워졌다고 느껴질 때 비로소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완벽이라는 단어에는 처음과는 다른 의미가 붙기 시작한다. 완벽은 단단한 목표라기보다 일의 흐름을 막는 기준이 되기도 하고,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압박이 되기도 하고, 실제로는 계속 손이 가는 반복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특히 디지털 환경처럼 변수가 많고 요구가 빠르게 바뀌는 세계에서는 완벽에 가까워지는 순간조차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화면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배포 시점에는 요구사항이 바뀌어 있을 때가 많고, 사용자 행동에 따라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흐름이 막히기도 하고, 기술적으로 구현되면서 구조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렇게 보면 완벽에 가까워지려던 모든 시도는 결국 잠정적인 결과물에 불과하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완벽을 추구하는 마음이 점점 작아지고, 그 대신 ‘지금 필요한 만큼만 완성해놓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힘’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다. 이 힘은 겉으로는 가볍고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깊은 감각에서 나온다. 완벽을 향해 달리며 마음을 소모해본 경험, 작은 차이를 만들기 위해 큰 에너지를 쏟아본 경험, 더 다듬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번에는 멈춰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해야 하는 순간들을 여러 번 지나야만 생기는 감각이다.


디지털 제품에서는 예측이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드물다. 프로토타입이 아무리 매끄러워도 실제로는 예기치 않은 지점에서 사용자가 멈추기도 하고, 데이터상으로는 분명 A 플로우가 좋아 보이는데 현장에서는 B 플로우가 더 자연스럽게 동작하기도 한다. 초기 버전에서는 가볍게 넘겼던 문제가 실제 서비스에서는 중요한 병목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신경 쓰며 붙잡고 있던 디테일은 사용자에게는 거의 관심 밖의 요소일 때도 많다. 이렇게 보면 완벽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방식은 디지털이라는 세계와 잘 맞지 않는다. 완벽을 향해 걸음을 멈추는 사람보다, 일단 나가보고 결과를 보고 다시 조정하는 사람이 훨씬 더 현실적인 흐름을 만든다.


그래서 경험이 쌓인 디자이너일수록 완벽함보다 속도와 리듬을 중시한다. 여기서 말하는 속도는 빨리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멈추지 않는다는 뜻에 가깝다. 흐름이 유지되는 상태를 지키는 것, 동료들과의 작업 리듬을 이어가는 것, 필요할 때는 기준을 낮추고 필요할 때는 깊이 들어가는 조절력 같은 것들이 일의 결과보다 일의 지속성을 결정한다. 완벽을 목표로 하는 순간 흐름이 끊기고, 흐름이 끊기면 팀의 리듬이 흔들리고, 리듬이 흔들리면 문제보다 감정이 먼저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완벽주의는 때때로 결과물의 질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팀의 리듬을 무너뜨리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반대로 흐름을 우선하는 사람들은 작은 결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화면에 미세한 정렬 오차가 있어도 흐름상 지금은 잡지 않는 것이 더 적절할 때도 있고, 컴포넌트 구조를 완전히 정리하지 않아도 당장은 필요한 부분만 먼저 정리하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다. 물론 이는 기준을 낮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기준을 상황에 맞춰 조절할 줄 아는 능력이다. 어떤 문제는 지금 해결해야 하고, 어떤 문제는 다음 단계로 넘겨야 하고, 어떤 문제는 아예 나중에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판단이 쌓이면서 이 능력은 자연스럽게 자라난다.


완벽하지 않아도 계속 움직이는 힘은 결국 마음에서 비롯된다. 실수를 해도 괜찮다는 마음, 틀린 선택을 했더라도 돌아오면 된다는 마음, 나중에 더 좋은 판단을 할 수 있다는 믿음 같은 것들이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결과물보다 과정에 더 많은 가치를 두고, 과정의 리듬을 지키기 위해 불필요한 부담을 스스로 덜어낸다. 마음이 지치지 않아야 판단이 날카로워지고, 마음이 버티고 있어야 작업이 오래 간다.


디자인을 오래 하다 보면 알게 된다. 완벽한 결과물은 오래 기억되지 않지만, 흐름을 잃지 않는 사람은 오래 기억된다는 것을. 한 번의 완벽함보다 여러 번의 안정적인 결과가 더 큰 신뢰를 만든다는 것을. 완벽한 화면보다 계속해서 나아가는 리듬이 팀을 성장시킨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완벽이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쓰기 시작했다. 완벽을 이루기 위해 힘을 쏟기보다는, 흐름을 지키기 위해 힘을 남겨두는 방식을 선택했다. 스스로의 마음을 지키는 일이 결국 일의 시간을 지키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대신 멈추지 않으면 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정답보다 확률을 선택하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