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의미다 - 173
‘가식(假飾)’은 ‘말이나 행동 따위를 거짓으로 꾸미는 것’을 뜻한다. 우리말의 ‘~척한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다. ‘~척’은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그런 것처럼 행동한다는 말이다. 선으로 위장한다는 ‘위선(僞善)’은 ‘사실은 착하지 않지만, 겉으로 착한 척한다’라는 뜻으로 악한 의도를 가리기 위해 고의로 선을 이용하는 것이다. 인간이 행하는 가식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위선을 행하는 사람을 ‘위선자’라고 한다.
인간은 태어나 긴 기간 동안 정해진 예의범절 교육을 받으며, 그 예의범절을 잘 지키며 살아갈 것을 자신도 모르게 강요받는 게 사실이다. 사회 어디를 가나 바른 예의범절의 언행을 볼 수 있으며 본받아 생활한다. 하지만, 실생활에서 인사와 행동 등의 언행이 겉치레로 하는 예절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형식적이고 겉치레의 행동들을 모두 가식적이고 위선이라고 치부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진심이든 아니든 상대가 행하는 예의범절은 선악의 개념을 배제하고 봐야 한다. 가식은 상대방에 대해 배려 차원에서 선의의 거짓말로 좋은 의도를 포함한 예도 상당히 많다. ‘위선도 선이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가식이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가장 성행하는 곳이 인터넷 공간이다. 실제 많은 대화, 블로그, SNS 등은 보이는 것은 화려하지만 대부분이 실제 모습과 다른 것이 사실이다. 가식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열광하는 이유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것들과 순간만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을 대리만족하는 것이다. 또한 나는 솔직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가식적이라고 배타하며 ‘가식쟁이’라고 밀어내기도 한다. 정확한 확인이 불가능한 인터넷 공간에서는 어디서부터 가식인지 개개인에 따라 다르고 그 기준을 쉽게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 딜레마지만, 사람 사는 곳에서는 현실이든 인터넷 공간이든 최소한의 예절이 필요하다는 점은 다 똑같다.
젊은 세대는 유교 문화권의 정당한 예절을 요구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하며 서구권에 대한 호감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지만, 현실에서 가식 여부에 무관하게 최소한의 예절을 갖추지 못하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비판받으며 환영받지 못한다. 무조건 외국 문화에 대한 환상에 젖은 행동일 뿐이다.
가식과 위선이 조롱과 비판의 대상이지만, 현실적으로 누구나 가식을 부리는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 모두 어느 정도 가식의 얼굴을 하고 산다는 얘기다. 사실은 가식과 위선이 현실 사회를 매우 바람직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지나치기 쉽다. 자신과 타인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거나 해를 입히는 순간은 사람들이 가식을 벗는 순간일 때가 많다. 누구도 가식과 위선을 부리지 않고 ‘솔직함’이라는 핑계로 걸러지지 않은 말과 행동에 더 큰 상처를 입기 때문이다. 적어도 약자를 배려하는 척, 정의로운 척, 사회의 슬픔에 공감하는 척 가식이라도 부리면 누구도 상처받지 않고 넘어갈 일이 가식을 벗는 바람에 문제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적어도 ‘가식 권장’ 시대가 되었으면 하고 희망하는 이유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가식과 ‘~척’하는 것을 싫어하고 경멸한다. 이는 타인을 이용하거나 해치고, 타인의 마음을 속이거나 뒤통수를 치는 등 구체적인 나쁜 의도를 품은 체 가식과 위선, ‘~척 ‘하기 때문이다. 사기꾼의 전매특허이기도 하다. 이러한 가식적인 접근에는 마음을 재빨리 닫아걸고 경계 태세에 돌입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 이럴 때 가식보다 솔직함이 훨씬 나아 보인다. 사기꾼이 ‘나 사기꾼입네’하고 절대 솔직하지 않으니, 문제다.
가식과 위선이 전혀 없이 늘 솔직하고 선만을 행할 수 있는 완벽한 인격으로 이루어져 있는 사람이 존재하기는 할까? 가식이 사라지고 인간의 솔직한 마음만 있는 온전한 세상은 존재할 수도 없다. 가식이 없다고 말하는 자체가 가식이다. 그런 점에서 가식을 부리지 않으려고 노력할 게 아니라, 오히려 가식을 최대한 잘 부리려고 노력하는 편이 현실적인 선택이다. 최대한 위선으로 가식의 마음 근육을 높이기 위해 죽을 때까지 노력한다면 결국 선인으로 세상에 남지 않을까. 착하지 못하니 착한 척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진짜 착하면 더욱 좋고.
가식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위조한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선을 위조하기 위해 가식을 부리는 사람은 대개 자신에 대한 타인의 평가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웬만하면 타인의 말을 귀담아들으려 노력한다. 그래서 말이 잘 통하고 더 속기 쉽다. 가식이 위선으로 통하는 이유다. 하지만 상대에게 위조할 것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바닥까지 드러내는 솔직함이 미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딱딱하고 말부터 통하지 않는다.
솔직함이 멋진 미덕인 것만은 분명하다. 누구나 각별한 사람들에게 솔직하고 진실해지려고 노력하며, 그런 사람을 곁에 두고 싶어 한다. 하지만 솔직함을 무기 삼아 해서는 안 되는 말들을 거르지 않고 쏟아내는 사람들을 경험할 때마다 솔직함에 지치는 건 어쩔 수 없다.
아름다움은 감추는 데 존재한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육체보다 가릴 부분을 감춘 육체가 아름다운 것은 당연하다. 포커에서도 내 패를 다 보이면 게임은 하나 마나다. 감추는 데 인생의 묘미가 있다는 것은 만인이 동의하는 사실이다. 모두 밝혀지고 벗겨지면 허무만 남듯이 숨은 곳에 호기심이 발동하고 미지를 탐험하는 것이다. 말도 행동도 사랑도 육체도 까발려서 잘 되는 것을 못 봤다. 잘 숨겨야 오래 보존된다는 진실은 자연의 섭리다. 숨기고 사는 것이 매력을 지키는 최고의 비법이다.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솔직하고 비밀이 없어야 해!’ ‘절대 숨기는 것이 있으면 끝이야!’라고. 당연히 ‘당근!’이라 명쾌하게 대답하지만, 솔직하게 털어놨다가 대판 싸우고 깨질 위기에 처해 본 사람은 안다. 그 솔직함의 당황스러움을. 얼마나 꽁꽁 잘 숨기느냐가 사이를 잘 연결해 주는 마법이 끈이라는 것도 안다.
솔직하다는 또 다른 표현이 요즘 각광받고 있는 ‘쿨하다’일 것이다. 쿨하다로 포장된 정제되지 않은 독설과 부적절한 말들이 얼마나 난무하는가. ‘적어도 난 솔직하다’라는 말을 이용해 약자를 위하는 척하지만, 결국 약자를 이용해 자기만족을 먼저 채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이제는 적어도 가식과 위선이라도 보여줬으면 좋겠다. 사회적 참사와 같은 타인의 비극과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겠으면 눈치껏 이라도 슬퍼하는 척, 내 기분에 거슬리더라도 적어도 도덕적 흐름을 받아들이는 척,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는 척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척’ 한다는 것이 뭔가 께름칙하고 떳떳하지 못해도 척하는 것들이 모여 관계가 개선되고 내가 바라는 삶이 되는데 든든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가식은 가장 속되지만 가장 필요한 기술이다. 인간 세상에는 가식이라는 게 필수 불가결하다는 얘기다.
사람들은 ‘솔직한 나’를 자랑하고 큰 자부심을 품고 있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솔직함이니 그보다 쉬운 일도 없다. 아무 노력도 안 하고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편하게 사는 게 솔직함이다. 무언가를 숨기고 가식적으로 산다는 것이 훨씬 더 머리 굴려야 하고 어렵다. 누구도 당신의 그 맹목적인 솔직함을 원하지 않는다. 솔직함의 불편함이다. 솔직함을 세상에 뿌리지 말고 마음속에 넣어두는 것도 미덕이다. 가식을 응원하고 싶은 이유다. 타인에게 나쁜 짓을 하려는 악의적 의도가 없는 한에서, 가식에는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어 보고자 하는 부단한 노력이 숨겨져 있다. 좋은 사람인 척 흉내 내며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 앞으로 가식의 언행을 보이면 ‘넌 가식적이야!’하고 비난하기보다 ‘~노력이 가상하네’라고 눈감아 주자. ‘알면서 속아준다’라는 미덕을 발휘하시기를~!
세상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은 진실과 솔직함이 아니라 가식과 위선일 때가 많다. 좋은 의미의 가식을 부리려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결국 좋은 사람으로 남는다. 세상을 편하게 하는 가식과 위선으로 잘 포장하여 살아가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