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의미다 - 196
‘회피(回避)’는 ‘불쾌하거나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상황을 직면하지 않기 위해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그 상황을 피하는 행동이나 태도’로 행동적 회피(특정 장소 등을 피하는 것)와 인지적 회피(불쾌한 생각을 피하는 것)로 나눌 수 있다.
회피 행동이 나타나는 심리는 특정 상황에서 불안을 느낀 사람은 그 상황을 피함으로써 일시적으로 불안을 줄이는 보상을 얻을 수 있고, 특정 상황에서 부정적인 결과를 과대평가하거나, 자신의 대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인지적 왜곡이 회피 행동을 유발하기도 한다. 또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여 중요한 결정을 미루는(회피) 행동으로 나타나며, 애착형 사람은 정서적 친밀감이나 갈등 상황을 피하는 경향이 있는데, 성인이 되어 관계에서 감정적 개입을 회피하는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회피의 심리는 불안, 두려움, 또는 부정적인 감정을 피하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문제를 악화시킬 수 있다. 특정 상황, 감정, 책임 등을 의도적으로 피하려는 행동이나 생각으로 불안, 스트레스,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하는 자극을 피하려는 방어 기제이기도 하다. 이렇게 회피는 우리 삶에 긍정적이기보다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는데, 문제를 직면하지 않으므로 근본적인 해결을 방해하여 문제 해결의 지연, 성공 경험을 쌓을 기회가 줄어들어 자신감과 자아 효능감이 낮아지고 감정적 회피는 대인 관계에서 오해와 갈등을 유발하여 인간관계를 악화시킨다. 심리학에서는 회피가 단기적으로 불안을 완화하지만, 장기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본다. 학창 시절에 시험공부를 피하면 당장은 스트레스가 줄지만, 시험에 대한 불안은 더 커지는 경험이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불쾌한 생각이나 기억을 억제하려는 시도는 역설적으로 그 생각을 더 자주 떠오르게 만들어 잠들지 못하는 경우도 흔한데, 이를 ‘억제 역효과(thought suppression paradox)’라 한다. 나아가 부정적인 슬픔, 분노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는 시도는 감정 억제나 분리로 이어져 정서적 소진이나 우울증 등으로 연결될 수도 있으니 너무 극단적 억제나 회피는 피하는 것이 좋다.
회피 행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여러 정신질환 있는데, 공황장애, 사회불안 장애, 광장공포증 등의 불안 장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 특정 상황(군중, 밀폐된 공간 등)을 피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강박적 사고를 유발하는 자극을 피하려는 행동이 자주 나타나는 강박장애, 트라우마를 상기시키는 장소, 사람, 대화를 피하려는 회피 행동이 핵심 증상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사회적 고립이나 책임 회피의 우울증, 사회적 거절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대인 관계를 극도로 피하는 회피성 인격장애 등이 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사회적 기대나 체면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 갈등이나 실패를 피하려는 회피 행동이 더 두드러질 수 있다. 사실 자신의 실수를 드러내는 것을 피하거나, 대인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침묵하는 경우가 흔한 것도 사실이다. 이는 개인주의 문화에서보다 회피가 사회적 조화 유지의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회피는 불쾌하거나 위협적인 자극을 피하려는 심리적 경향으로, 생존 본능의 ‘도피’와 비슷하다. 이는 위협이나 해로부터 보호하고 새로운 환경 학습을 가능하게 한다. 인간은 독초나 포식자를 피함으로써 생존 확률을 높였고, 현대에서 불안 상황 피하는 행동으로 잠재적 실패나 사회적 손실을 방지한다. 또한 위험하고 부정적인 경험을 회피함으로써 회피 행동을 강화하여 반복적 위험을 줄인다. 진화적으로는 익숙하지 않거나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생존 위협으로 인식하여 회피를 촉진한다. 하지만 회피는 단기적으로 불안을 완화하고 생존 능력을 증가시키지만, 생존 본능의 일부로서 과도한 회피는 사회적 고립 등의 생존에 역기능을 초래할 수도 있다.
인간의 회피 심리는 생존 본능과 깊이 연결하는 것은 주로 진화 심리학의 관점이다. 생존 본능은 위협이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생명을 유지하려는 본능적 반응으로, 회피는 이 본능의 핵심 메커니즘 중 하나이다. 생존 본능은 인간과 동물의 진화 과정에서 형성된 자동적 반응 시스템으로, 외부 위협을 감지하면 싸우거나 도망치는 행동을 유발하게 된다. 따라서 달아나려는 회피 본능은 유전자 전달과 종의 번식을 최우선으로 작동하여 위험을 최소화한다. 회피는 우리 인류가 위험한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게 해준 적응 메커니즘이다.
회피가 생존 본능의 일부이긴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과도하면 문제 해결을 지연시킬 수 있다. 건강 검진을 회피하는 것은 잠재적 질병을 피하고 싶은 본능이지만, 결국 장기 생존을 위협한다. 현대 환경에서 과도한 회피는 때때로 부적응 작용할 수 있으므로 균형이 중요하다.
과도한 회피는 우울증이나 사회적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변화의 시대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회피하는 습관은 역설적으로 생존 능력을 떨어뜨릴 수 있음도 사실이다.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회피하는 것도 불확실성을 위협으로 보는 본능 때문이다.
이러한 심한 회피 심리를 극복하기 위하여 인지행동치료를 통해 회피 행동의 원인이 되는 왜곡된 사고를 교정하고, 점진적 노출을 통해 두려운 상황에 직면하도록 돕는다. 마음 챙김으로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을 억제하지 않고 수용하며 관찰하는 연습을 통해 회피를 줄이고, 회피하지 않고 행동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장기적 보상을 명확히 인식하도록 돕는 동기 강화 훈련도 도움이 된다. 한편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회피 행동을 줄이고 지원을 받는 사회적 지지도 회피 심리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손무가 쓴 병법서인 손자병법에도 마지막 전략(36계)은 줄행랑이다. 쉽게 말하면 회피고 도망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도망치는 것은 비겁한 행동으로 치부되지만, 끝까지 모든 노력을 해보고 답이 없다면 포기할 수밖에 없다. 사실 무작정 회피(도망)하는 것은 전략도 아니고 속수무책이다. 최고의 전략이 정답이 아닐 때는 차선을, 차선도 없을 때는 회피(포기)하는 것밖에 달리 선택할 방도가 없다. 스스로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노력하고 난 뒤에는 어떤 선택이든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인간관계든, 업무처리든, 성공을 위한 과정이든 내 안의 남은 에너지를 모두 소진했을 땐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것이 비겁한 도망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퇴장 아닌가.
손자병법의 마지막 지혜가 도망가는 것이라는 깊을 뜻을 새기는 것도 삶의 또 다른 지혜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