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선희 Aug 12. 2023

현실적이고 소심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5, 6학년 내내 오직 인기 하나만으로 부반장 자리를 꿰차고 있던 남학생 B가 있었다. 그가 반장이 아닌 부반장에 그쳤던 이유는 B는 성적이 아닌 오직 인기 하나만 내세워 승부를 겨뤘기 때문이었다. 얼굴도 잘생기고, 키도 크고, 싸움도 잘했던 B는 여학생들에게는 만인의 연인이었고 남학생들은 그 앞에서 쪽도 못쓸 만큼 위세가 대단했다.


나는 B가 참 싫었다. 남들은 좋아하는 애를 싫어했던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그가 나를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잘생기고 인기도 많은 남학생이었으니 B만 나를 좋아했다면나도 굳이 밀어낼 이유가 없었을 테지만 그 애는 티가 날 정도로 날 싫어했다. 초등학교 때는 좋아하는 이성에게 반대로 행동한다고? B도 그런 것이 아니었겠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에게는 두부 자르듯 '노'라고 단칼에 대답할 수 있다.  그 정도는 충분히 느낄 만큼의 감은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되려 나는 남들보다 눈치도 빠르고 감도 뛰어난 학생이었다. 그런 내가 누가 나를 싫어하는지, 아니면 좋아하면서 싫어하는 척을 하는지를 어찌 분간하지 못할 수가 있을까.


"야!! 넌 왜 입술이 그렇게 까매? 너 무슨 병 있냐?"

마치 혐오 음식을 눈앞에 두고 있는  찡그린 표정으로 툭 뱉는 한 마디는 마음을 마구잡이로 할퀴었다.

"야, 야, 쟤옆에 가지 마. 병 옮아."

B는 나를 그런 식으로 왕따 시켰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 애는 싸움도 잘했고 힘도 세고 반을 주름잡는 학생이었기에 꿈틀거리지도 못하고 당해야만 했다.


그런데 어느 날 B의 이미지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요즘 만화책을 학교에 가져오는 친구들이 많다는 제보를 받았다. 그래서 지금 소지품 검사를 할 테니 모두들 책가방 책상 위로 올리고 손 머리 할 것."

그 사건은 담임선생님이 불시에 소지품 검사를 했던 날 일어났다. 우리 반 말썽담당 지훈이 가방에선 갖가지 불량식품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고, 뒤에 앉은 새침데기 윤미 가방엔 도끼빗이 들어 있었다.

"너는 가방에 왜 도끼빗을 넣어가지고 다니고 그래?

여기가 미용실이야? 왜, 고데기도 가지고 다니지."

'하하하하' 친구들은 윤미의 창피함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큰소리로 웃었고 윤미는 벌겋게 달아오는 얼굴로 고개를 떨군 채 입술에 연신 침을 발라댔다.


드디어 선생님이 B의 자리로 다가갔다. 꼬질꼬질한 B의 가방을 거꾸로 잡고 인정사정없이 흔들어 털어대던 선생님은 대뜸 B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게 뭐야? 이 놈의 자식! 얼굴은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아이고 더러워라."

선생님이 B의 가방에서 꺼낸 건 바로 고춧가루와 밥풀이 화석처럼 말라비틀어져 붙어있는 숟가락이었다.

"이게 언제부터 여기 있던 거야? 구더기 안 나온 게 다행이네. 야, 자식아. 가방정리 좀 해라 ."

나는 보았다. B가 세상 억울하다는 듯 씩씩거리며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모습을. 반친구들은 B의 눈치를 보며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킥킥거리기만 했고 그 와중에 고소함을 참지 못한 내 웃음소리가 적막을 뚫고 튀어나와 버렸다. 그걸 들은 B는 나를 살쾡이 같은 눈으로 흘겼고 소지품검사가 끝나고 쉬는 시간에 B의 똘마니 명이 내 자리로 찾아왔다.

"야!!   B가 앞으로 조심하래."


그 뒤로 B는 나를 더욱 적극적으로 갈구어 댔다.

한 번은 내가 학교에 장난감 요요를 가지고 간 적이 있었다. 친구들이 너도 나도 빼앗아 가지고 놀고 있는데 B가 다가왔다.

"이거 누구 거야?"

"이거? 선희 거."

친구손에 들려있던 요요를 낚아챈 B가 갑자기 어금니를 질끈 깨물더니 힘을 주어 요요에 달린 끈을 끊어버리는 거였다. 마치 철천원수를 갚는 표정으로 눈동자에는 장작 수십더미를 한꺼번에 태울 수 있을 만큼의 강력한 불꽃이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하루하루 불편한 날들을 보내다 초등학교 졸업이 다가왔고 B를 벗어나게 된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에 탄산음료를 들이부은 것처럼 시원해졌다. 나는 졸업식날 B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혼자 키득거리며 중얼댔다.

'네가 아무리 센척하고 멋진척해도 내 눈에 넌 고춧가루 묻은 숟가락으로 밖에 보인다고. 별것도 아닌 게 까불고 있어. 앞으로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 자~알 살아라.'




여중을 고만고만한 성적으로 졸업한 나는 부천시에서 손꼽히는 여고에 들어가못했고 어찌어찌 성적에 맞추다 보니 남녀공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학기 어느 날 친구들과 매점에서 사발면을 허겁지겁 먹고 있는데 내 옆으로 훤칠한 남학생이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뭐지? 이 싸늘한 느낌은?'

옆에 있던 친구가 갑자기 호들갑을 떨어댔다.

"야야 , 쟤좀 봐. 쟤. 너무 잘 생겼어."

나는 라면 먹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말았다.

"아! 고춧가루...... 숟가락......"

"뭐? 숟가락? 너 쟤 알아?"

3년 만에 나타난 B를 보자마자 떠오른 건 고춧가루 묻은 숟가락이었다.

"나 좀 소개해 줘라 응?"

"...... 보기와는 달라. 쟤가 초등학교 동창이었는데 말이야. 소지품검사하는 시간에 ,......."

그 얘기를 하는 동안 내 입가엔 의미심장한 미소가 어렸다. 나는 숟가락 얘기를 연막탄으로 들고 다니며 B를 소개해달라는 그녀들의 시야를 가리려 노력했고 침이 마르다 못해 입이 쩍쩍 갈라질 정도로 정성껏 그 얘길 들려주었다.


3년 만에 복수가 시작된 것이었다. 영향력 하나 없고 소심하기 짝이 없는 나름의 복수는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채 그렇게 3년 내내 이어져갔다.




매거진의 이전글 후회가 남긴 아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