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비전 프로 1
2023년 6월 애플의 WWDC에서 마침내 애플 비전 프로가 발표됐다. 워낙 루머라는 꼬리표를 달고 디테일한 홍보 소식들을 많이 접했던 터라 제품 자체보다는 정말로 저런 게 나왔구나 하는 마음으로 발표 영상을 보게 됐다. 영상을 보고 나서 나는 좀 멍해졌다. 당장 드는 생각은 이런 거였다. 20년 전에 스티브 잡스가 처음 아이폰을 공개한 발표를 보고 사람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당시에 나는 근육병 증세가 전례없이 빠르게 안 좋아지고 있었고 큰 수술을 받은 후유증까지 겹쳐 진짜 거짓말 아니라 하루가 다르게 몸이 약해지던 때였다. 그래서 그즈음 유행하기 시작하던 풀터치 디스플레이를 탑재한 MP4 플레이어나 스마트폰 같은 건 그야말로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체중을 실어 겨우 물리 버튼을 누를 수 있는 바형 핸드폰을 쓰기는 했지만 몸이 안 좋아 학교를 자퇴하게 되면서는 더 이상 쓸 필요조차 없어졌기에 세상을 휩쓴 아이폰 신드롬으로부터 나는 완벽하게 안전했다. 사실 애플이라는 것도 몰랐지만.
비전 프로가, 애플은 곧 죽어도 공간 컴퓨터라고 우겨대지만(일견 동의한다), 결국은 VR 고글임을 감안할 때 역시나 나랑은 전혀 상관 없는 제품일 수도 있었다. 그런 류의 제품은 이미 나온 지 오래고 구 페이스북 현 메타의 구 오큘러스 현 메타 퀘스트는 게임이나 전자기기에 관심 있는 사람치고 모르지 않을 정도다. 나도 게임 좋아하고 전자기기에 관심 많은 사람으로서 VR 고글은 정말 해보고 싶었던 제품이었다. VR 하면 떠오르는 롤러코스터, 현실에서 타볼 일은 없으니 가상에서라도 타보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고개를 제어할 수 없어 누우나 앉으나 머리를 받쳐주지 않으면 거짓말 살짝 보태 죽을 수도 있는 중증 장애인인 나로서는 투박하기 짝이 없는 헤드셋을 쓰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쓴다 해도 머리를 좌우로 움직일 수 없으니 컨텐츠를 즐기는 데도 제한적이다. 그런데도 애플 비전 프로는 내게 비전을 보여줬다.
먼저 첫 번째로 비전 프로는 밴드형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에야 웬만하면 비전 프로가 무엇이고 어떻게 생겼는지 정도는 대체로 알 거라고 생각되지만, 잠수용 수경이나 스키 고글 같은 것을 떠올리면 된다. 앞쪽은 얼굴을 반이나 덮는 통으로 된 큰 무언가고 그것을 머리 뒤로 밴드가 고정한다. 비전 프로도 두 개의 디스플레이와 그것을 구동하는 컴퓨터 칩 등 모든 부품을 엽기적일 정도로 욱여넣은 본체를 두툼하고 부드러운 밴드로 머리에 고정한다. 사실 디자인이 여타 VR 고글에 비해 유려하기는 하지만 역시나 비전 프로 또한 투박하긴 하다. 게다가 애플의 유서 깊은 메탈과 유리에 대한 집착이 비전 프로에도 구현돼서 안 그래도 무거운 VR 헤드셋을 더 무겁게 만들어놨는데 그걸 밴드 한줄로 지탱하려니 앞쪽 얼굴이 어떻게 될지는 뻔할 뻔자다. 실제 출시 직후 애플로부터 장치를 대여 받은 유튜버들이 벌개진 얼굴로 비전 프로가 얼마나 놀라운 장치인지 리뷰하는 영상들을 보는 것은 좀 묘한 느낌이었다. 그렇기는 해도, 공식 홍보 영상에도 나오듯이, 비전 프로는 누워서도 쓸 수 있다. 그것만으로 그동안 VR 고글이란 나와는 관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온 내게 파문을 일으킬 돌 하나가 될 법했다.
두 번째로는 조작이다. 일반적인 VR 고글은 양손으로 쥐는 컨트롤러로 제어한다. 게임이 메인 컨텐츠이기도 하고 물리적이고 익숙한 형태의 컨트롤러는 매우 당연한 물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나한테는 그러한 기기를 제어할 가능성이 없어지게 된다. 터치 인터페이스를 다룰 수 없어 스마트폰을 못 쓰고 키보드 마우스도 아주 제한적으로만 다룰 수 있어 보조 장치가 필요한 내가 그런 컨트롤러를 조작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런데 비전 프로는 컨트롤러를 아예 만들지 않았다. 진짜 과감함은 애플을 따라갈 기업이 없는 것 같다. 공간 컴퓨터임을 자처하며 애플은 게임의 G자도 꺼내지 않고, 비전 프로를 쓰고 여유롭게 손가락을 꼬집는다. 그게 다다. 비전 프로는 사용자의 손을 추적해 시야에 보이는 모든 것을 제어한다. 꼬집어서 선택하고 팔을 움직여 움직인다. 물론 나는 할 수 없는 행동들이다. 하지만 전용 컨트롤러를 강제하지 않는다는 것과, 내가 본 마지막 비전 때문에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바로 시선 추적이다. 앞서 손가락으로 꼬집어서 선택한다고 했는데, 꼭 대상을 직접 꼬집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꼬집는 동작만 인식된다면 손은 무릎 위에 두고 꼬집기만 해도 된다. 그 순간 사용자가 보고 있는 것. 예를 들면 사파리 아이콘을 보고 있다면 사파리 창이 실행되는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가장 큰 비전을 봤다. 시선 추적. 그래, 저거라면.
잠깐 시선 추적에 대해 얘기해 보겠다. 장애인 보조 장치로 시선 추적기는 꽤 오래 전부터 많이 쓰여왔다. 일반적으로 적외선 장치를 모니터에 부착해 사용자의 시선을 추적하고 사용자가 바라보는 아이콘이나 문자를 선택하는 식으로 작동한다. 안경의 여부나 조명 상태 등 시선 추적의 정확도에 영향을 끼치는 변수들이 있기 때문에 보통 시선 추적기를 판매하면서 함께 끼워파는 전용 소프트웨어들을 보면 선택할 수 있는 버튼들의 크기가 매우 크게 디자인되어 있다. 그리고 시선 추적기는 엄청나게 비싸다. 단순히 연구용으로 간단하게 제작된 물건들도 있고 오픈소스 DIY 제작이 가능한 키트도 있긴 하지만 실제 사용자로서 느끼기에 중요한 건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 같다. 엄청나게 비싼 장애인용 시선 추적기가 사실은 소프트웨어에 끼워파는 물건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런데 나는 한 자세로 오래 있을 수가 없어서 1시간에 한번 꼴로 휠체어 등받이를 젖혔다 세웠다 하며 컴퓨터를 하는데 모니터를 등받이에 붙여놓지 않는 이상 시선 추적기는 의미가 없다. 그렇다. 비전 프로를 쓰고 있으면 내가 눕든 앉든 일관되게 시선 추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의 가능성들로 비전을 본 내게 마지막으로 걸리는 것은 앞서 말했듯 조작이었다. 눈으로 사파리 아이콘을 본다고 치자. 선택은 어떻게 할 건데?
비전 프로에 대한 루머를 접하기 이전부터 나는 애플 유저였다. 왜냐하면 애플 제품을 다른 제품들보다 더 쉽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애플 제품들에는 이름부터 ‘손쉬운 사용‘이라는 접근성 기능들을 제공한다. 설정에 들어가 손쉬운 사용에 들어가면 청각, 시각, 운동 능력, 인지 능력을 보조해 주는 기능들이 끝도 없이 나열된다. 나 같은 경우에는 아이맥에서 손쉬운 사용 키보드와 대체 포인터 동작이라는 기능을 메인으로 쓰면서 가끔 음성 명령을 썼고, 아이패드에서는 스위치 제어 기능을 썼다. 손쉬운 사용 키보드는 화면에 띄우는 가상 키보드인데 완전히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하고 한국어 자동 완성을 지원한다. 내 입맛에 맞게 만든 손쉬운 사용 키보드를 띄우고 마우스 커서를 움직여 원하는 버튼 위에 올리고 나면 클릭을 해서 선택을 하면 되는데 나는 클릭을 못 하기 때문에 이때 대체 포인터 기능을 쓴다. 아이맥에 내장된 카메라로 내 표정을 인식해서 클릭을 대체하는 것이다. 입술을 왼쪽으로 하면 왼쪽 클릭, 오른쪽으로 하면 오른쪽 클릭. 또, 스위치 제어는 내가 터치 인터페이스를 활용할 수 있게 해주는 기능으로 아이패드에 연결한 입력 장치나 다양한 소리로 앱을 선택하거나 글을 쓸 수 있게 해준다.
그렇기에 나는 애플을 믿었다. 분명히 비전 프로에도 손이나 눈을 대체할 손쉬운 사용법을 마련했을 거라고. 6월의 개발자 발표회 영상에서는 그러한 내용이 없었다. 하지만 며칠 뒤 정확히 내가 원하는 내용이 올라왔다. 마찬가지로 개발자 포럼에서 공개된 것으로 실제 비전 프로용 앱을 어떻게 만드는지를 소개하는 내용 중 접근성 섹션이 있었던 것이다. 비전 프로의 주요 입력 수단인 손과 눈 그리고 음성을 어떻게 대체할 수 있는지 예제까지 들어가며 소개하는 애플이 나는 정말 고마웠다. 그리고 결심했다. 비전 프로 산다.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