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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리 Nov 26. 2024

일과 삶의 방식,
동네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회사

카페 겸 문화공간을 표방하며 동양가배관을 시작하고 몇 년이 흐르면서 점차로 우리의 역할이 확장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3년 6월, 우리는 결국 ‘패치워크’라는 이름으로 기획 회사를 만들고 여전히 비어 있는 상태였던 동양가배관 위 3~4층 공간을 추가로 개발하게 된다.


한 줄로 압축해서 쓰니 굉장히 간단히 일어난 일 같지만 시작하면서 고민이 정말 컸다. 동양가배관을 처음 만들 때에도 그랬듯, 스스로를 설득하는 게 먼저였다. 우리가 이 지역에서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일까? 지역을 넘어, 우리는 이 세상에 왜 존재해야 할까? 그리고 개인의 삶에서 이 일은 어떤 의미일까? 몇달간 이런 질문을 치열하게 던졌다.



업의 확장,
일을 재정의하다.


가장 먼저 했던 건, 우리의 일을 새롭게 정의하는 것이었다. 확장된 시선으로 우리가 해왔던 일을 바라보니 '우리가 해왔던 건 배다리라는 지역을 하나의 브랜드로 바라보고 이곳만의 로컬 콘텐츠와 공간을 개발하는 일'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은 동양가배관 하나만 생각했었는데, 동양가배관이 우리의 첫번째 브랜드라고 생각하니 우리가 하는 일이 다르게 보였다. '배다리를 기반으로 특색 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문화공간·카페'에서 '배다리에서만 경험 가능한 공간과 브랜드, 콘텐츠를 만드는 크리에이티브 기획사'로 우리를 다시 정의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이름을 지을 차례였다. 이름을 지을 때는 항상 '어떤 의미를 담고 싶은가'를 가장 먼저 고민하게 된다. '다양한 영역의 사람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일', '무언가 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 등의 의미를 놓고 고민하다 '패치워크'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패치워크란, 다양한 색깔과 모양의 천조각을 이어 붙여 만드는 섬유공예 작업을 이르는 말이다. 다양한 소재를 엮어낸다는 특성도 그렇고 부르기도 편하고 아날로그한 작업 방식이 우리가 있는 배다리 지역과도 잘 어울렸다. 여러모로 마음에 드는 이름이었다. 그 길로 사업자 등록을 했다.


이름을 짓고 '패치워크 스피릿'도 정의해 보았다.




우리는 왜 존재해야 하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이름도 지었고, 공간도 계약했는데 내 안에서는 자꾸만 싸움이 일어났다. '도대체 우리가 이걸 왜 해야 할까?' 변화의 바람이 빠르게 불어온 탓인지 마음이 어지러웠다. 밤만 되면 가슴이 답답해서 산책을 나갔다. 계속해서 걸으면서 머릿속에 엉켜 있는 생각을 쏟아내고 또 쏟아내야지만 잠을 잘 수 있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것이 설레면서도 책임져야 할 공간이 늘어난다는 것도 부담스럽고, 내가 이곳을 잘 운영할 수 있을지 겁이 났다.


결국 나를 살린 건 '우리는 어떤 사람들과 연결되고 있으며, 연결되고 싶을까?'라는 질문이었다. 기존에 동양가배관을 자주 찾아와 줬던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고 온라인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리뷰를 찾아 보았다. 몇몇 사람들에게는 인터뷰를 청해 대화를 나눠 보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혼자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아 주변 사람들을 참 많이 괴롭힌 것 같다. 다양한 의견을 보태준 사람들 덕분에 패치워크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해볼 수 있었다.


잠들어 있는 것 같았던 오래된 지역의 가능성을 상상하고 생기 있는 동네로 살려내는 로컬 브랜딩과 문화적 도시 재생의 역할

가치 있는 이야기를 진정성 있는 태도로 끈기 있게 알려주며 지역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문화 매개의 역할

또다른 일과 삶의 방식을 꿈꾸고 실험하는 과정에서 영감을 얻고 서로를 응원하는 커뮤니티의 역할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표현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해결소의 역할


사람들에게 '패치워크가 사라지면 어떨 것 같아? 우리가 망할 수도 있잖아.'라는 질문도 자주 했는데 "슬플 것 같아. 내가 일과 삶을 다르게 상상하고 시도할 수 있는 실험의 장이 사라지는 거잖아. 다른 방식으로 일하고 살 수 있다는 희망 자체가 사라지는 느낌일 것 같아."라는 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조금 원대하게 생각하자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일과 삶의 ‘대안’(alternative)을 다양하게 만드는 일, 도시에 문화적 상상력을 불어넣는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일과 삶의 방식,
동네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곳


"일과 삶의 방식, 동네의 가능성을 다양하게 꿈꾸고 실험할 수 있도록 돕는 진정성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제공하자."는 목표를 세우고 본격적인 공간 기획에 돌입했다. 우리가 이 지역에 와서 느꼈던 좋은 것을 공간 경험으로 풀어내고 싶었다.


내가 배다리에 와서 가장 좋았던 것은 '잘 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나를 검열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일단 해보는 자유로움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용기 있게 드러냈을 때 나와 비슷한 동료들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도 내가 느낀 좋은 점이었다. 세상의 기준과는 조금 다르더라도, 새로운 일과 삶의 방식을 꿈꾸는 사람들이 작은 실험을 함께 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3층 공간에 자유로운 표현의 가치를 담아 '프린트아웃'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프린트아웃은 나만의 방식으로 일하며 살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창작 실험실입니다. 완벽주의와 검열은 잠시 내려 놓고,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그야말로 ’프린트아웃‘ 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열립니다. 서로의 과정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든든한 동료들이 함께하는 곳이기도 해요.
Before & After
프린트아웃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다양한 슬로건으로 표현해 보았다.
프린트아웃의 다양한 장면들


4층 공간은 '내 안에 깊이 몰입하며 힘을 얻는 영감의 공간'으로 컨셉을 잡았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배다리에서, 나는 나에게 집중하는 힘을 배웠다.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내가 이미 가진 것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예전에는 살림집이었던 4층의 독특한 방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코너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기획자를 위한 작은 방, 코너룸은 ’좋은 기획은 언제나 자신과의 대화로부터 시작한다‘는 믿음으로 만든 도구 상점입니다. ‘기획하는 사람’을 위한 책과 문구, 툴킷을 섬세하게 고르고 소개해요. 소란스러운 세상과 잠시 거리를 유지한 채, 나에게 꼭 맞는 도구를 발견하고 스스로에게 중요한 결정을 내려 보세요.


폐허에 가까웠던 코너룸의 옛 모습
현재 코너룸의 모습


프린트아웃은 자유롭게 이동하고 변형할 수 있도록 모든 가구에 바퀴를 달았고 다양한 색채가 모여 있는 활기찬 느낌으로 만들었다면, 코너룸은 오래 전부터 수집했던 빈티지 가구와 소품을 중심으로 내 안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로 꾸몄다.


어느덧 두 개의 공간을 오픈하고도 1년이 흘렀다. 벌써 이곳에서도 많은 이야기들이 쌓였다. 공간이 생기니 이전에는 일어나지 않던 일들이 일어나게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흔적을 남기고 갔다. 이곳에 모여든 사람들의 에너지는 또 무엇으로 이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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