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인도 전통음악 Raga 을 배우고 알게 된 것들
지난 9월부터 라가 Raga를 배우고 있다. 라가는 북인도 고전음악의 모드 mode(선법)를 총칭하는 개념으로써 서양(유럽) 고전음악과는 문법이 상당히 다르다. 한 학기 동안 내가 알게 된 것들 몇 가지를 공유하고자 한다.
서양의 음악은 음계가 고정되어 있다. 몇몇 악기를 제외하고 도는 항상 도, 레는 항상 레. 하지만 라가는 시작점이 다르다. 나는 라가를 부를 때 (내 목소리에 맞는) Ab~A에서 시작하지만, Eb에서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서양 음악의 모드는 고작해야 메이저와 마이너(3종), 도리안, 프리지안, 리디안, 믹소리디안, 로크리안.. 열개 정도밖에 안되지만, 라가의 종류는 500개 정도 된다. 정확히 셀 수조차 없다고. 이와 관련하여 언젠가 아티클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인도에서는 최상위층 (브라만)들이 음악을 직접 연주했다. 반면에 서양에서 예술가는 중류층에 속했고. 지배계층이 향유하는 예술이었으니 인도의 음악은 풍부히 발전할 수 있었다고. 이유야 더 따져볼 수 있겠지만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라가는 유럽 음악처럼 도레미파솔라시도 혹은 CDEFGABC를 쓰지 않는다. 그리고 이 음계는 라가에 따라 높낮이가 달라진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C메이저(다장조) 스케일을 기준으로 볼 때, 바이라브 Bhairav의 경우, Re와 Dha는 플랫된 음이다. 그래서 S, R, G, M, P, D, N, S는 C, Db, E, F, G, Ab, B, C와 비슷하다.
한편 야만 Yaman의 경우는 Ma가 반음계 올라간 음이다. S, R, G, M, P, D, N, S는 C, D, E, F#, G, A, B, C가 되는 것이다.
사족으로, 서양 고전음악에서는 #4(증 4도)를 그토록 혐오했다고 한다. Tritone이라는 이름이 있지만 devil's interval이라고 불리기도 한다고. 야만은 (아쉽게도) 인도 신앙과 관련된 라가는 아니고, 13-14세기 유행하던 멜로디에서 따왔다고 한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라가마다 음계가 다르게 적용되는데, 이게 나처럼 절대음감이 있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헷갈리는 부분이다. 음을 들으면 바로 '도레미파'와 같은 고정 음계가 자동으로 연상되기 때문이다. 음을 듣고서 의도적으로 'Sa, Re, Ga, Ma'를 떠올리고, 특정 라가를 대치시키는 데 엄청난 집중력이 요구된다. 새삼 절대음감이라는 말이 얼마나 서구적인 시각에서 생겨난 것인지, 또한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인도 음악에는 악보가 따로 없다. 즉흥연주의 이름은 알랍 Alap. 알랍은 내가 이 라가를 연주할 거야-라고 소개하는 파트라 보면 된다. 알랍 역시 두 개의 파트로 나뉘는데, 느린 템포로 음 하나하나를 짚어주는 조 Jor, 템포가 빨라지고 타블라 등 리듬악기와 함께 본격적으로 연주되는 자라 Jhala가 있다. 하지만 조와 자라는 완전히 분리되는 파트가 아니고, 반대로 또 훨씬 더 세분화하여 나눌 수도 있다.
50분까지가 jor, 그다음은 jhala. 그리고 1:05부터 본격적으로 곡 시작.
알랍이 무작정 연주되는 건 아니다. 라가마다 음을 쌓아나가는 규칙이 존재한다. 야만의 경우, 기본음 Sa의 아래에 있는 Ni를 소개하고, 그다음엔 Pa, Ga.. 뭐 이런 식으로 순서에 따라 음을 하나씩 소개하게 된다. 하나의 프레이즈가 끝날 땐 반드시 기본음 Sa로 돌아오는 것도 알랍의 규칙 중 하나. 규칙을 따르되, 즉흥연주여야 한다. 즉흥연주라 하면 눈앞이 깜깜 해지는 사람이 있는데, (는 바로 나) 선생인 마리안느가 좋은 조언을 해주었다
Imagine you're describing something appealing to you - a tree, flowers, nature, or something that makes you happy or sad. You're creating your own story about it within the rule. Yes, rule. You're in the boundary of something, but remember, you're totally free. Get influenced by the environment around you, and create the story with it
인도 음악에 매력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가 이거다. 음이 고정되어 있지도 않으며, 음과 음 사이에도 음이 존재한다. 오선지가 절대 담아낼 수 없는 음. invisible notes within notes. 서양식의 사고로라면 음이탈이라고 할법한 음이라도 라가에서는 멜로디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오선지로도 쓸 수 없는 음. 인도에도 정확한 표기법이 없다. 애초에 악보도 없고. 그렇다면 어떻게 익히느냐. 인도의 음악은 완전히 구비예술이다. 선생님을 카피하면서 배우는 것이다. 여전히 엄격한 선생님들은 필기도, 녹음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게 수천년을 이어온 예술이다. 엄청난 집중력과 열정을 요구하는 일. 그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 도전한 이들 덕분에 음과 음 사이에 무한한 음이 생겨났다. 우주가 생겨났다. 그리고 지금도 그 우주를 부른다.
음과 음 사이에 음이 존재하는 게 매혹적이지만, 내겐 엄청난 핸디캡이기도 하다. 노래를 하는거야 그렇다치고, 내 악기 - 반도네온 - 으론 그 예민한 음을 연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튠이 나갔다고는 하지만 고정 음계를 갖고 있는 악기이기 때문이다. 다른 현악기나 관악기를 연주하는 이들에 비해 어려움이 크다. 불가능한 건 아니다. 재미있게도 반도네온의 친척뻘인 하모니엄이 인도 음악의 주요 악기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하다보면 얼추 라가라고 우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가져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