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가을
“눈물의 1학년”
제목에는 ‘석사학위 이야기’라면서 아직 대학원 이야기가 나오려면 한참이다. 하지만 대학교 이야기를 빼 놓고는 이야기를 풀 수 없는 점을 이해해 주셨으면 한다. 보통의 경우에는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 석사 과정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내가 왜 첫번째 석사를 영국에서 하게 되었는지, 왜 내 전공은 프랑스사가 되었는지에 대한 것들 대부분이 대학교를 다닐 적에 정해졌기 때문에 “석사학위”를 제목에 버젓이 달고서도 나의 대학교 시절의 이야기를 먼저 풀 수 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이다.
어디 한번 보자 지난 편에는 어디까지 썼더라? 그래 “눈물 겨운 재회”. 정확한 표현이 아닌 것 같다. 내 1학년을 표현한다면 “눈물”로 바꾸는 것이 조금 더 맞겠다.
우여곡절 끝에 토론토 대학교가 제공하는 어학연수까지 마치고 무사히 대학교를 시작할 수 있었다. 드디어 눈물 겨운 재회를 하게 될 줄 알았는데, 대학교 1학년의 첫 주를 지날 즈음엔 눈물이 앞을 가렸다. 우선 가장 큰 문제는 영어였다. 수강신청한 강의들을 들을 때마다 나의 영어실력에는 적색 경고등이 떴다. 도무지 영어를 알아먹을 수가 있어야지! 어학연수 수료가 “위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학 강의에서 교수들이 말하는 영어를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학연수 과정에서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말해주는 영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생전 들어보지 못했던 슬랭을 썼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가득한 대학에서 온갖 억양의 영어를 들을 때면 ‘이게 영어라고?’라는 생각만 들었다. 이 느낌은 대학을 가자마자 시작되었고, 만 2년의 시간 가까이 기다리고 나서야 “진짜”(?) 영어의 괴롭힘 강도가 줄어들었다. 그래도 영어가 주는 고통은 여전히 현재진형형이다. 어학연수 코스를 성공적으로 마칠 무렵, 어린 그 시절의 나는 오만했다. 그에 대한 벌은 지금도 톡톡히 받고 있다.
첫 수업이 ‘정치학 개론’이었던 것 같다. 복수전공이 졸업 요건 중 하나였기 때문에, 여러 전공을 고민하다가 정치학을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문사회계는 다 비슷할 것이라 안일하게 생각했다. 여담이지만 학년이 올라가며 들었던 정치학 과목에서 ‘숫자’들이 등장했다. 수학의 트라우마가 온 몸을 감싸는 것을 감지하자마자, 조금의 아쉬움도 없이 정치학을 전공하는 건 그만뒀다. 내 인생에서 숫자는 연도를 외우는 것에서 그쳐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후에도 어떤 전공이 나에게 맞는지 몰라 여러 전공을 전전했다. 정보를 얻을 곳이 없어서 – 혹은 내가 찾지 못해서 – 온갖 학과의 개론 수업을 “시식”하면서 방황을 했다. 3년차가 될 때까지 시행착오는 계속되었다. 지나고 보니, 그 정도 시행착오는 나의 경험치를 늘려주었다. 전공을 못 정하고 빙빙 돌아다녔던 덕분에 인문사회계의 다양한 전공들에 대해서 한 10초 정도는 아는 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자꾸 이야기가 삼천포로 샌다. 아무튼 정치학 개론의 첫 수업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시간이 오래 흘러버린 이유도 있지만, 사실은 첫 수업의 20%도 못 알아들은 것이 주된 이유다. 1,000명은 훨씬 더 들어갈 대강당에서 강의자의 목소리는 2시간동안 왕왕 울려 대고, 앞에 걸린 무지막지한 크기의 스크린에는 단어도 몇 개 안 적힌 파워포인트 슬라이드가 넘어갔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말이다. 슬라이드의 내용을 받아 적는 것조차 종종 버거울 때가 있었다. 첫 학기는 그야말로 디지털 버전의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요’였다. 캐-내다에서 대학물을 처음 마시게 된 2011년 9월, 나는 또 다시 듣지도, 말하지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레벨로 돌아갔다. 정치학 개론 수업을 시작으로 첫 주에 있던 모든 수업의 내용 대부분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첫 주가 끝날 즈음에 몸무게를 쟀던 기억이 있다. 첫 수업이 시작하던 날과 비교했을 때, 한 주를 마무리할 때 나는 4kg이나 빠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족들은 달리 기억한다, 고작 2kg였다고. 아마 4kg은 내 착각이겠지. 허나, 그 때의 잊을 수 없는 충격과 공포는 30살이 넘은 지금도 내 머릿속 구석에 남아있었던지 나는 아직도 그 충격의 양을 4kg로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첫 주가 중간 정도 지날 즈음이었을 것이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강의자의 말이 단 하나도 들리지 않는 느낌인데, (최소한) 4년동안 수업을 들어야 한다고? ‘하고 싶고, 안하고 싶고’의 문제를 넘어, ‘가능한가?’의 영역까지 생각이 다다랐다. 하지만 머릿 속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 개론 강의들의 오리엔테이션 수업들을 이해하는 것조차도 많은 시간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그 때 내 앞에 토론수업이 나타났다. 지금 이 글을 쓰며, 토론수업이라는 말만 들어도 아찔하다. 인문/사회계통의 많은 수업들은 약 15-25명 규모의 ‘토론수업’이라는 것을 한다 (대학에 따라서 이런 종류의 수업은 Tutorial Class, Discussion Section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데, 토론토 대학교에서는 Tutorial이라고 불렸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토론 방식의 수업은 한번도 해본 적도 없는데, 갑자기 토론수업? 게다가 영어로 듣는 것도 못하는데, 말까지 하라고? 대부분의 인문/사회 강의들은 추가적인 토론수업이 필수인 덕분에 피할 수 없었다.
첫 튜토리얼 수업에 들어갔다.
오호 통재라. 본 강의가 커피였다면 Tutorial 수업은 T.O.P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