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총

시인의 문화기행

by 김백


제6화 - 천마총(天馬冢) 上



― 황금의 무덤, 두 왕의 전설


천년의 숲에도, 약속이라도 한 듯 겨울이 내려앉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들이 전사의 깃발처럼 갈퀴를 세운 채 서로 부딪히며 흙길을 점령하고 있었다. 경주 대릉원 깊숙한 곳, 둥근 봉분들 사이를 걷다 보면 발밑의 흙에서도 오래된 냉기가 올라왔다.


이 숲 한가운데에는, 아직도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은 무덤이 하나 있다.

천마총이다. 천 년 동안 땅속 깊이 잠자던 황금 보관을 고스란히 전해준 무덤이지만, 정작 그 주인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 비밀을 좇는 사람들의 발길은 오늘도 끊이지 않고, 신라의 자궁 속을 드나들고 있다.


- 가장 큰 무덤은 언제나 마지막에 남겨진다.


천마총은 본래 경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황남동 98호분 발굴에 앞서 시험 삼아 발굴된 고분이었다. 98호분은 표주박형의 쌍분으로, 동서 폭 80미터, 높이 23미터, 기부 길이만 120미터에 이르는 초대형 고분이다. 전형적인 고신라 적석목관분으로, 말하자면 천마총은 이 거대한 발굴을 앞두고 시험발굴된 ‘대타’였다.

무덤을 여는 일은, 죽은 자보다 살아 있는 자들의 마음을 먼저 흔든다.

당시 사가들은 “경륜이 짧은 우리의 기술로 경주지역에서 가장 큰 고분을 발굴하는 것은 영웅적 발상에 불과하다”며 우려했다. 박·석·김 씨 문중 또한 신라 시대에는 이 세 성씨가 왕위를 이어갔으니, 분명 자신들 조상의 무덤이라며 발굴 자체를 반대했다. 그럼에도 발굴은 강행되었고, 그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금관과 천마도, 금제 허리띠와 말갖춤 등 귀중한 유물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결국 계획은 바뀌어, 천마총은 공개 전시장이 되었다.


- 어둠은 언제나, 가장 찬란한 것을 숨기기 위해 먼저 온다.


천마총 내부로 들어가는 통로는 어두웠다. 잠시 눈을 어둠에 맡기고 나면 전시관이 열린다.

땅속에서 나온 황금은 빛을 발하기보다, 그 빛을 오래 참고 있었던 듯 보인다.

이름 모를 무덤의 주인은 찬란한 금관을 머리에 쓴 채 천 년의 잠 속에 들어 있었다. 금제 머리띠와 사슴뿔처럼 솟은 관식, 꽃봉오리 모양의 금판, 나뭇잎처럼 늘어진 드리개들. 유리벽 너머로 보는 시선에서 상상은 자연스럽게 날개를 단다. 전시관에는 피장자의 목관과 부장품들이 실물 크기로 복원되어 있다. 모두 재현품이지만, 그 배치와 무게감은 당시 장례의 위엄을 충분히 전하고 있다.


- 왕은 죽어서도 쉽게 드러나지 않도록, 돌과 나무로 다시 태어난다.


천마총은 돌무지덧널무덤, 즉 적석목관분이다. 평지에 구덩이를 파고 시신이 든 목관을 안치한 뒤, 그 위와 주위를 냇돌로 층층이 쌓는 방식이다. 시신은 대개 단독 매장이며, 부장품은 유난히 풍부하다. 경주 일대의 적석목관분은 5~6세기에 전성기를 맞으며 점차 반월성 북쪽으로 이동했고, 규모 또한 대형화되었다.

이 무덤이 말을 하지 않으니, 이제 왕들의 시간을 불러낼 차례다.

출토 유물과 묘제 형식으로 볼 때 천마총은 5세기말에서 6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신라의 왕은 두 사람, 21대 소지마립간과 22대 지증마립간이다.


- 신라에는, 사랑으로 몸을 태운 왕이 있었다.


『삼국사기』 소지왕 편은 그의 치세를 비교적 자세히 전한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에 맞서 신라는 백제, 가야와 연합 전선을 구축했고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구벌성과 도나성을 쌓고 삼년산성과 굴산성을 개축했으며, 487년에는 우역을 설치하고 도로를 보수했다. 490년에는 신라의 서울에 처음으로 시장을 열어 각 지방의 물산이 모이게 했다.


- 왕이 변장을 하고 길을 나선 것은, 나라보다 한 사람을 먼저 떠올렸기 때문이다.


590년 9월, 소지왕이 날사군(지금의 영주)에 행차했을 때 파로라는 사람이 자신의 딸 벽화를 바쳤다. 벽화는 열여섯 살의 소녀로 신라에서 이름난 미인이었다. 왕은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궁으로 돌아온 뒤 벽화를 잊지 못해 남루한 옷으로 변장하고 날사군을 드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의 모습이 고타군(古陁郡. 안동)에 사는 한 노파에게 발각됐다. “만승의 자리에 있는 제왕의 신분으로 신중하지 못하다”는 질책을 받은 왕은 자신의 행동을 부끄럽게 여기고 벽화를 궁으로 데려와 사랑에 빠졌다.

소지왕은 벽화와의 불타는 사랑으로 몸을 돌보지 않았던 탓인지 그해 11월 세상을 뜨고 말았다. 벽화는 소지왕과 불과 두 달 동안의 짧은 사랑으로 유복자인 왕자를 낳았다. 이때까지 소지왕은 자식이 없었는데 이때 얻은 왕자가 유일한 후사였다. 98호분 발굴에서 60세의 남자와 16세 여자의 골편이 발굴되었는데 소지왕과 벽화의 순장묘가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소지왕 다음의 지증왕이 순장제도를 폐지했는데 벽화의 슬픈 이야기가 그 원인이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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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총- 소지왕인지 지증왕인지 누구의 무덤인지는 모르지만 왕이 누웠던 자리인 것만은 확실하다



- 소지왕 뒤에 오른 이는, 사랑보다 제도를 믿은 왕이었다.


지증마립간(437~514)은 예순넷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삼국유사』는 그를 체격이 웅대하고 담력이 대단한 인물로 전한다.

삼국유사의 이야기를 빌리면 왕은 (지증왕 때 왕의 칭호가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뀜) 음경의 길이가 1자 5척이나 되어 마땅한 신붓감을 구하기 어려웠다. 지증왕은 사자를 삼도로 보내 신붓감을 찾게 했다. 모량부에 이르렀을 때 사자는 동노수 아래에서 개 두 마리가 북만 한 똥덩이를 물고 다투는 광경을 보았고, 그 똥의 주인을 찾아 상공의 딸을 발견했다. 여인의 키는 일곱 자 다섯 치였고, 왕은 수레를 보내 그녀를 맞아 왕후로 삼았다.

동노수라는 이름은 이두로 풀면 ‘똥 노수’로도 해석된다. 태초에는 자연 전체가 화장실이었고, 배설은 부끄러운 행위가 아니었다. 신라에는 이미 좌식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고, 불국사에는 지금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화장실은 정방, 해우소 등으로 불리며 몸과 마음의 근심을 덜어내는 공간이 되었다.


- 왕의 이름이 나라가 되던 시절이었다.


지증왕은 국호를 ‘新羅’로 정하고 순장 제도를 폐지했다. 왕의 칭호를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꾸었으며, 우산국을 정벌했다. 국가는 이때 비로소 제도의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왕이, 자신에게 맞는 무덤을 얻는 것은 아니다.

체격이 웅대했던 지증왕을 떠올리면, 길이 2미터 남짓한 천마총의 목관은 어딘가 작다. 요대와 관의 크기 또한 보통 체격에 맞는다. 그래서 이 무덤은, 끝내 주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소지왕의 무덤일 수도, 지증왕의 무덤일 수도, 혹은 더 오래된 왕의 자리일 수도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곳에 왕이 누워 있었다는 사실이다.


- 천마는 지금도, 하늘 어딘가에서 날고 있을지 모른다.


사랑으로 몸을 태운 왕이었든, 제도로 나라를 세운 거인이었든, 황금과 말, 인간과 국가를 함께 묻은 왕. 천마총은 오늘도 천년의 숲 한가운데서 자신의 주인을 밝히지 않은 채 조용히 숨 쉬고 있다. - 下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