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여백 20
비에 젖은 역사의 불빛이 그날처럼 창백하다
지금 막 도착한 상행선 무궁화호 열차
헤드라이트 불빛에 분절된 걸음들이 대합실을
빠져나가고
비는 내리고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내렸다
우리는 구포역 대합실에서
상행선 열차를 몇 번이나 그냥 보내고
회벽에 걸린 시계추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말 없는 눈빛도 언어였으므로
우리는
다음 열차도 그다음 열차도
다시는 오지 않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머니 속 기차표를 움켜쥔
우리의 침묵은
침목처럼 비에 젖고 있었다
플라타너스, 플라타너스 나뭇잎은
너의 캔버스에서
무성한 연애사처럼 자라고
그 여름이 두 번 더 지나가고
나는 얼룩무늬 이마에 손을 얹고
복숭아꽃 들판을 달리는 밤차의 전별에
‘통일‘이라고 경례했다
그 밤의 기차가
나를 싣고 시계추처럼 흔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