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툭 치면 울어버릴 것 같던 날. 기억으로는 모의고사를 아주 못 봤던 것 같다. 지금은 별일 아니지만 당시에는 세상이 무너질 것 같던 어느 날. 그 애가 뭣도 모르고 내 필통을 활짝 열더니 필기구를 후드드득 바닥에 떨어뜨렸다. 프라이팬에 달걀을 깨듯이. 컴퓨터 사인펜까지 모조리. 눈물이 똑 떨어졌다.
“하지 말라고! 오늘 기분 안 좋다고 했잖아.”
장난이 입꼬리에 매달려 있던 그 애는 흔들리는 동공을 하고서 조심스럽게 책상에 필통을 내려놓았다. “미안, 미안해”하면서 안절부절못하더니 복도 끝으로 달려갔다 다시 돌아왔다. 쓱 밀어주는 딸기 우유 두 개. 미안하다는 말도 더는 하지 못하고 수업종이 칠 때까지 곁에 앉아있던 그 애. 그때였나 보다. 그냥 친구에서 좋아하는 친구가 된 건.
오랜만에 영화 <플립>을 보면서 그 애 생각이 났다. <플립>의 주인공 줄리는 새로 전학 온 브라이스에게 첫눈에 반해서 적극적으로 다가간다. 반면 브라이스는 줄리를 밀어내며 여러 번 상처를 입히는데 줄리가 속상해서 마음을 접으려 하자 어쩐지 이젠 브라이스가 줄리를 좋아하게 된다. 초등학생 아이들의 성장과 사랑이 순진하고 깜찍해서 자주 봤는데 볼 때면 그 애가 앉아있던 3분단이 떠오른다. 쌍꺼풀 없는 민숭한 얼굴. 큰 키에 매일 수학문제를 풀던 그 애는 <플립>의 브라이스처럼 잘 생기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왠지 줄리처럼 계속 다가가게 됐다.
이과생이었던 그 애는 이과에서 문과로 교차지원을 하게 되어서 고등학교 2학년 5월쯤 문과였던 우리 반으로 왔다. 학기 중간, 아는 친구도 없고 큰 키 때문에 3분단 맨 뒷자리에 앉아 어쩐지 외로워 보이던 얼굴로 문제집만 풀고 있었다. 신경 쓰였다. 신경이 너무 쓰여서 이미 풀었던 수학문제를 가지고 앞자리에 앉았다.
“너 이과였어서 수학 잘하지? 이 문제 잘 모르겠어서. 알려줄 수 있어?”
첫 눈빛은 황당함이 가득했던 것 같다. 아니면 당황이었나. 그렇게 3분단을 지나갈 때면 툭 건드리며 아무 말을 건넸다. “필통 어디 거야?”, “이과 애들은 샤프 뭐 써?”, “왜 맨날 앉아있어?” “심심해서 왔어.” 두 번째 눈빛은 부담이 가득했지만 3분단을 찾아갈 때마다 점점 그 애의 눈가에 생기가 도는 게 좋았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되었고 수업을 듣는 대신 같이 빙고 게임을 했다. 밤 열한 시쯤 공부를 마치고 침대에 누우면 내일 학교 가서 그 애와 빙고 게임을 할 생각에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눈을 감았다.
그러는데도 좋아하는지를 몰랐다. 대학교 가서도 종종 만나면 재밌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전까지 누구를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사랑이 낯설어서 사랑인 줄 몰랐다. 그렇게 3학년이 되어 다른 반이 되고 졸업을 하면서 민둥하게 어색해졌다.
좋아했다는 걸 깨달은 건 아주 한참 뒤였다. 대학교 2학년쯤 술자리에서 영화 <플립> 이야기가 나와서 브라이스가 사랑을 알아차린 순간에 대해 열변을 토하다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나 그 애를 좋아했구나. 딸기 우유를 받고서 바로 마시지 못했던 건 간직하고 싶어서였구나. 브라이스보다 내가 더 바보였네.
살짝 휘청이며 집에 돌아가는 길에 딸기 우유 하나를 샀다.
여전히 상큼하게 달콤했다. 그리고 금방 호로록 마셔버렸다.
이제 지나버린 첫사랑인걸.
그저 가끔 술 마시고 나면 딸기 우유를 사 먹는다. 호로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