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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로파 May 17. 2023

초를 켜놓고 하는 생각

캐리어 안의 짐을 다 정리하고 나서야 책상에 놓인 향초에 불을 붙였다. 단정한 향기가 퍼진다. 클라리 세이지 향이 은은하게 다가온 후에 차분해진 마음을 두드리듯 민트와 레몬 향이 한 스푼 닿는다. 마지막에 퍼지는 우드와 머스크는 상쾌하게 코를 감싼다. 소박하지만 풍성한 정원의 향기다. 눈이 내리던 날 시모키타자와를 걷다가 향초 가게의 창문이 살짝 열려 있어 그 사이로 향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화려한 향 사이에서 가장 낮게 깔려 있었지만 담백하면서도 오묘함에 끌려 샀던 향초였다.


‘그저께의 시모키타자와는 추웠는데.’


향초 표면의 왁스가 열에 녹아 투명하게 변해간다.


여행에서 온종일 걸었던 만큼 돌아온 날에는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다.

단위 시간당 움직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오늘도 책상 앞에 앉아 방의 불을 끈다. 어두운 방 안에는 향초가 내는 낮은 조도의 빛과 저 멀리 켜놓은 간접 조명 하나에서 흘러나오는 주황색 불빛뿐이다. 향초와 가까운 벽에서 실크 벽지가 반짝였다. 죽죽 그어진 회색 무늬 사이로 펄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그레이 톤인 줄로만 알았는데. 눈길을 옮길 때마다 벽지의 별들이 반짝인다. 너무 환한 낮에는 방 안의 별이 보이지 않았다.


말없이 디저트를 한 입 베어 물고 멍하니 향초 표면에 기포가 조금씩 올라오는 모양을 쳐다본다. 왁스는 유리병 안에서 버섯바위처럼 허리가 잘록하게 녹았다. 허리가 움푹한 탓에 유리병의 허리께와 향초 사이엔 공기가 차고 그 공기는 잘게 나뉘어 조금씩 향초 표면으로 떠올랐다. 작은 공기 방울 몇 개가 커다란 공기 방울로 금세 합쳐지고 표면에서 대기를 만나 사라졌다.


방 안의 존재는 조용하지만 작은 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 창문 너머 4차선 도로에서 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일시에 들리는 자동차 바퀴 소리, 간간이 들리는 사이렌 소리, 윗집 또는 옆집의 사람이 움직이는 소리. 생활 소음은 이 세상에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내게 끊임없이 알리는 것만 같다. 마음이 힘들 때는 ‘그래도 벽 너머에 너와 같은 사람이 누워 있어’하는 위로처럼 느껴진다. 괜히 발가락을 꼼지락댄다. 뜨거움에 가까울 만큼 따뜻한 방바닥에 발가락이 닿는다. 여행에서 단단해진 종아리가 풀리는 느낌이 든다. 근육이 물렁해진다.


일상은 팽팽히 당긴 활시위 같다.


처음에는 벅차도 같은 자리에서 같은 양으로 노력하는 것에 익숙해지면 활시위를 조금 더 당긴다. 그러면 약간의 힘을 또 더한 후, 그 당김에 익숙해지면 앞의 과정을 다시 반복한다. 모두가 활시위를 당기고 있으니까 내 팔뚝이 버겁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활시위 위에 날아갈 화살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은 어디론가 피융-하고 쏜살같이 날아가는 게 아니니까. 삶의 결말도 시속 200km로 과녁에 꽂히는 일은 아닐 것 같았다. 날릴 화살은 없지만 계속해서 활시위를 당기면 줄은 끊어지겠지. 팽팽함에 무감각해진 나조차 곧 줄이 끊어질 것 같다는 위기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홀로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 없이 종일 떠돌았다. 활시위를 당기던 손을 나만 내려버린 것 같아 걱정되는 마음을 떨쳐 내려고 열심히 다리를 굴렸다. 마음대로 해도 생각보다 어긋나는 건 없다는 걸 실감하고 싶은 것처럼.


향초의 불을 끈다. 공중에는 세이지 향기가 남았다.

팔뚝과 다리와 마음은 물렁하다.




독립책방 독서관에서 연재한 여행 에세이입니다. (연재 링크)

다음 편에서는 후쿠오카에서의 낮과 밤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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