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止まれ)’ 사인이 유난히 골목마다 눈에 띄었다. 일방통행이나 30km/h 이하로 달리라는 표지판도 있었는데도 정지 사인만 볼 때마다 움찔거렸다. 마주칠 때마다 수집하듯이 필름 카메라로 담았다. 경고의 의미를 담은 ‘止まれ’가 차곡차곡 카메라 안에 기록되어 갔다. 멈추라는 표지판이 눈에 띈 건 인생에 멈춤이 필요해서였을까.
몇 주 전, 나는 뭐든 적당히 웃어넘기지 못하는 상태였다. 쓸데없이 진지했다. 진지하기보다는 무거웠다. 무겁다고 뭐가 잘 되는 게 아닌데. 오히려 되던 것도 잘 안된다는 사실도 알면서도 도통 가라앉은 기분을 끌어올리지 못했다. 그럴 땐 극약처방이 여행이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사회적인 의무감이 지워지는 공간에서 나를 자유롭게 풀어두고 나면 다시 돌아가 웃어낼 힘이 생겼다. 무언가를 다시 시작해 볼 에너지가 솟았다. 그래서 적당한 농도의 이질감이 느껴지는 곳에 나를 떨궈놓고 싶었다. 비슷한 건물과 사람들이 살지만 낯선 언어와 분위기가 섞인 동네. 후쿠오카가 적당했다. 코로나로 인한 여행 제한이 풀리자마자 후쿠오카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일부러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곳저곳 골목길을 기웃대고 있는데 계속해서 마주쳤다. 멈추시오, 정지, 止まれ, 멈춤, STOP, 스탑, 스탑, 스타압-. 차량을 위한 표지판이었을 텐데 나는 멈춤 표지를 만날 때마다 움찔대며 몸을 움츠렸다. ‘잠깐만, 그렇게 사는 게 맞는 거야?’하고 계속 물어오는 듯한 느낌. 답은 모르겠어서 열다섯 개쯤 멈춤 사인을 만나고 나니 도망치고 싶어졌다. 나카스 강변으로 향했다.
나카스 강을 이어둔 다리를 여러 번 건너는 동안 사람들은 포장마차인 야타이로 모여들었다. 야타이 옆을 지나치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야타이에 앉은 사람들은 다른 세상에 있는 양 전혀 의식하지 않았고 즐거워 보였다. 그들은 어떤 확신이 있어 낄낄대며 맥주를 들이켜고 있는 걸까. 아니면 불안한 속내를 포장하려 더 과장하며 웃어대고 있는 걸까. 검게 꾸물대고 있어 물에 비친 네온사인도 어지럽게 꾸물대는 나카스 강 옆에 앉아서 말이다. 검게 꿈틀대는 나카스 강보다는 밝은 척 이빨을 드러내며 젓가락으로 안주 몇 개를 뒤적거리는 걸까. 문득 이어폰 사이로 <지친 하루>가 들려왔다.
거기까지라고 누군가 툭 한마디 던지면
그렇지 하고 포기할 것 같아
잘한 거라 토닥이면 왈칵 눈물이 날 것만 같아
발걸음은 잠시 쉬고 싶은 걸
딱 한 잔만큼의 눈물만 뒤끝 없는 푸념들로
- 지친 하루, 윤종신 곽진언 김필
그들은 오늘 밤 킬킬대며 술잔을 기울이고서도 집에 히죽대며 돌아갈까. 아니면 돌아가는 길에 ‘止まれ’ 표지판을 마주치며 움츠릴까. 술은 마시지 않고서 발걸음을 돌렸다. 술을 마신다고 해결되는 건 없으니 조금 더 밤거리를 걸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