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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현 Jul 22. 2022

태어나서 처음으로 - 15. 꾹꾹 눌러쓴 편지

23살, 난생처음 홀로 떠난 교환학생

https://youtu.be/P9BUok9c0Zs

오늘의 영상





온갖 사랑이 난무하는 크리스마스예요. 늘 맑고 파란 하늘 아래 있어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는데 말이예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더라구요. 늘 통화로도 안부를 묻는 우리지만, 그래도 이렇게 글로 전하는 건 또 다를 것 같아서 편지를 써요.


서울은 좀 어떤가요? 아직도 조금 안쓰러운 색을 띈 도시이겠죠? 하지만 당신은 아니길 바라요. 산타가 입은 옷처럼 빨갛게, 세상의 채도를 높이는 색이길 바라요. 적어도 오늘만큼은.


난 크리스마스의 뉴욕이 보고 싶어서 5시간을 날아왔어요. 몇 번이고 돌려보던 드라마의 배경에 내가 있다는게, 믿기지가 않아요. 낮에 프렌즈에 나왔던 장소를 다녀왔는데, 그 깔깔 웃는 친구들이 1층 음식점에 있을 것 같은 생각을 누르느라 참 힘들었어요. 그리고서는 록펠러 센터 앞에 있는 스케이트장을 갔어요. 사람들은 손을 잡고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어요. 거대한 트리 앞에서 소원을 비는 사람도 있었어요. 나도 소원을 빌었어요. 언젠가, 당신과 여기에 올 수 있기를. 그때는 우리 아무 걱정도, 고민도 없기를.


진지하게 소원을 보는 내 모습이 웃겼는지, 같이 여행한 친구가 무얼 기도했냐고 물었어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어요. 당신이 더 이상 힘들지 않기를 바라는 내 마음은 어차피 설명할 수 없으니까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엄청 진심이고만."

치- 하고 웃으면서 같이 있던 그 친구가 조금 놀렸어요. 난 원래 뭘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역시 또 들켰던거죠. 그리고 그 친구가 맞았어요.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것, 행복하자는 것도 아니고 적어도 아프지 않게만 해달라는 것, 그걸 어떻게 그냥 바랄 수 있겠어요. 온 마음을 다해서, 기도하고 기도하는거죠.


당신은 늘 괜찮다고 했어요. 아니야, 괜찮아, 별거 아니야. 이렇게 말하면 난 그냥 철 없는 척, 그래? 하고 말죠. 차라리 나의 이야기로 분위기를 밝게 하는 것이 당신에게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예요. 그럴 때면 괜히 더 밝은 척 이야기하곤 했어요.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힘든 건 어디 머리속 서랍에 꽁꽁 가둬두고서는, 남은 것들만 나눴어요. 난 뭘 잘 못숨기니까, 어쩌면 그것도 들켰을 수도 있지만요. 그래서 그때 당신의 미소가 조금, 슬퍼보였던 걸까요? 당신은 나를 꿰뚫은 걸까요?


록펠러 센터 위로 올라갔어요. 순식간에 올라가는 엘레베이터 속도에 정신을 못차릴 것 같았어요. 약한 현기증을 느끼면서 내렸어요. 수 많은 불빛이 보였어요. 척과 블레어가 엇갈리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도,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초록과 빨강 불빛을 내고 있었어요. 엄청나게 높은 빌딩들이 가득한 그 도시를, 당신도 꼭 와봐야 하는데. 나만 이런 황홀함을 느끼고 있음에 작은 죄책감이 들었어요. 나는 당신과 있지 않았지만, 당신과 함께 있었으니 이번엔 용서해주세요.


그 높은 곳에 있자니, 당신이 언젠가 새를 부러워했던 것을 생각했어요. 그렇게 높이, 자유롭게 날고 싶다고. 당신은 날아서 어디를 가고 싶던 걸까요, 아니면 그냥 날아가서 떠나고만 싶던걸까요. 당신이 날 수 있다면, 여기 날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힘껏 소리지를텐데. 당신이 전에 그랬던 것처럼, 내가 아는 모든 것들을 당신에게 알려주었을텐데. 나의 모든 것을 나눌 수 있을 것 같은데.


저 멀리 다리가 보여요. 예쁘긴 한데, 샌프란시스코에서 본 다리가 더 아름다워요. 금문교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본인의 삶을 포기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일 수도 있어요. 생을 마감할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라니. 그리고 그 다리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고 들어서일 수도 있어요. 돈을 벌기 위해 엄청난 거리를 날아온 그들은, 그저 다리를 만들다가 스러졌어요. 금문교가 수 많은 노동자의 목숨과 눈물과 땀 이후에 반짝일 수 있다는 것이 소름끼치도록 무서우면서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들의 삶이 없었다면 그 아름다운 다리는 없었겠죠. 어쩐지 그 대목에서 그 노동자와 다리는 당신과 나의 관계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당신의 생이 없었다면 나는 없었을 테니까. 나의 생은 당신 생의 결과물이예요. 하지만 나는 당신을 혹사시키죠. 당신도 안해본 경험을 나에게 주기 위해 견뎠을 수 많은 순간들을 감히 가늠할 수도 없어요. 조금 압도되는 기분에 무서워져, 괜히 그 대목에선 눈물로 눈을 흐리게 가리곤 해요.


속박된 세상에서도 나를 위해 있어줘서 고마워요. 당신을 아프게 하는 것이 어쩌면 나의 원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요. 당신의 희생과 상처 없이 지금의 나는 없었을테니까. 내 인생에 아픔이 생겨나는 것들은 걱정말아요. 당신을 디디고 선 나의 죄니까, 당연한 결과예요. 당신처럼 대단한 사람을 희생시킨데는 결과가 따르는거죠. 난 뉴욕의 반짝임과 빨간 다리처럼, 그걸 버티면서 언제까지나 서 있을거예요. 당신에 대한 숭고한 사랑과 감사함으로, 언제까지나.


사랑이 난무하는 곳에서 말 밖에 전할 수 없지만, 나의 사랑은 향기처럼 당신과 함께 할 것임을 알아요. 보고 싶어요, 엄마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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