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말아요. 스노우맨.
사라진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다들 아는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에서는 동네 아이들이 피리 소리를 따라 사라져 버린다. 독일의 하멜른이라는 동네에서 실제 벌어진 일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는데, 도대체 어떤 선율이길래 아이들을 홀려 한날한시에 사라지게 만들었을까? 내가 하멜른의 아이들처럼 그 노래를 듣자마자 홀려 버린 때는 2019년 12월이었다.
해마다 학년말이면 혼이 쏙 빠지게 바쁘다. 기말고사 성적 처리에, 생활기록부 작성에, 성적표 발송에, 학기말 프로그램 운영에, 다음 해 반편성 등등...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일폭풍에 화장실 갈 시간도 부족해서 뛰어갔다 오고 어떤 날은 퇴근할 때 ‘아, 그러고 보니 오늘 화장실을 한 번도 못 갔구나.’ 하기도 하며, 그러다 방광염에 걸렸다는 동료도 있었다.
그런 12월 점심시간. 운동장 스피커에서 노래가 언뜻언뜻 들렸다. 겨울이라 평소 창문이 닫혀있었는데 마침 환기한다고 잠깐 열어놨는지 열린 창문 사이로 조금씩 들리는 선율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자꾸 운동장 쪽으로 향했다.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이 나오고 있다면 나한테는 ‘...하면...만나게...’하는 식으로 끊기며 들렸다. 그런데도 그 선율에 홀려서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당장 소리 따라 뛰쳐나가고 싶어 명치께부터 간질간질한 기운이 올라와 벌떡 일어섰다. 노래를 가만히 듣고 있을 여유 따윈 없는 상태라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 서류철을 정리하면서도, 이 노래를 이대로 놓칠 수는 없다는 다급한 마음에 앞에 앉은 사람한테 느닷없이 물었다. “샘, 지금 나오는 노래요.“ ”노래가 나와요? “ ”저기, 운동장 스피커에서 노래 나오잖아요. 무슨 노래인지 아세요?”
항상 친절했던 그 사람은 내가 5교시 수업을 들어갔다 나오자 방송반 아이한테 물어봤다며 노래의 제목을 알려줬다. 시아(Sia)의 ‘스노우맨(Snowman)’을 그렇게 만났다.
들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 좋은 노래를 하루 몇 번씩 몰아 듣고는 금방 심드렁해지도록 만들고 싶지 않아서, 이게 그럴 일인가 싶은 생각이 들긴 했지만, 하루 한 번씩 자기 전에 아껴가며 들었다. 그렇게 며칠을 듣다가 갑자기 어릴 적 TV에서 봤던 흑백 만화 영화가 떠올랐다. ‘맞다, 나 국민학교 때 눈사람 나오는 만화 영화가 있었지.’ 줄거리는 하나도 기억에 없는 걸로 봐서 왔다 갔다 하며 얼핏 봤던 거 같은데. 모자 쓴 눈사람이 녹아내리자 옆에 있던 여자애가 우는 장면만 또렷이 기억났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를 일요일 아침마다 봤고, 지구는 걔들이 다 지키는 ‘독수리 5형제’도 챙겨봤으며, 무쇠팔 무쇠다리 ‘마징가 Z’도 매주 봤지만 딱히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장면이 없는데, 지나가며 한 번 본 그 장면이 이제 와 기억의 빙하 저 밑에서 둥실 떠오른 게 신기했다.
설마 그 영화가 연관 있는 건 아니겠지... 하며 시아의 ‘스노우맨’에 대해 검색을 하자 눈사람더러 떠나가지 말라고 하는 가사 내용과 단편 영화 ‘프로스티 더 스노우맨(Frosty the Snowman)’에 대한 설명이 바로 나왔다. 가슴이 뛰었다. 세상에. 그 영화였다. 잠깐 봤던 장면의 그 영화가 이 노래의 모티브라니.
스쳐 간 만화 영화의 한 장면이 40년도 더 지나서 수면 위로 올라와 또렷이 기억이 날 정도로 뇌리에 깊숙이 박혔던 이유는 뭘까? ‘여자애가 우는 게 슬퍼서’였다면 그때 나도 같이 울었을 텐데 울었던 기억은커녕 슬퍼했던 기억도 없다. 헤어짐을, 사라짐을, 죽음을 속절없이 감당해 내야 하는 우리네 운명을 예고 없이 봐버린 충격 때문이었을까. 나도 저런 이별을 피할 수 없다는 예감 때문이었을까.
연대 세브란스 응급실에서 의사가 엄마에게 “차윤자 씨, 눈 떠 보세요. 옆에 누가 왔나 보세요. 따님이 왔어요. 차윤자 씨.” 외쳤을 때, “엄마, 정신 차려봐요. 엄마” 같이 한심한 소리나 하는 게 아니었다. 호흡이 곤란해 목에 관을 꽂겠다고 했을 때, 급히 중환자실로 옮길 때 엄마 손이라도 붙잡았어야 했다. “엄마, 나는 엄마 없이는 못 살아. 눈 떠봐. 엄마가 죽는 건 말도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이렇게 갑자기 가는 건 절대 안 돼. 엄마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거야. 빨리 눈 떠봐.” 울부짖었어야 했다. “엄마, 사랑해요.” 장례 치르며 관 붙잡고 얘기하면서도 부끄러워서 속삭이며 흐느끼다 쓰러질 게 아니라, 급성 심근경색이지만 엄마가 아직 의식이 있을 때 얘기했어야 했다.
Don’t cry snowman. Don’t leave me this way. (스노우맨 울지 말아요. 이런 식으로 떠나지 말아요.) ‘스노우맨’을 알게 된 지도 3년이 지났다. ‘다시 듣고 싶은 노래’를 주제로 글을 쓰겠다고 가사를 보며 시아의 노래를 듣는데 갑자기 눈물이 터져 계속 듣기가 힘들었다. 숨이 턱 막혀서 하아하아 숨을 골랐다. ‘이건 뭐지?’ 눈사람더러 떠나지 말라고 하는 가사가 엄마를 보낼 수 없었던 내 심정 같아서 눈물이 나는 건 알겠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들을 때마다 가슴에 사무친 듯 눈물이 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기를 며칠째 거듭하다, 비로소 익을 만큼 익은 생각 하나가 눈물에 섞여 흘러내렸다. ‘나는 엄마한테 할 말을 하나도 하지 못했구나... 그게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맺혀있었구나.’ “엄마, 나 왔어요.”한 후에 중환자실로 들어간 엄마가 “어렵겠습니다... 사망하셨습니다.”로 돌아왔으니까.
산 사람은 다 살게 마련이라, 몸뚱이만 남아서 무슨 정신으로 살았는지 도통 모를 세월을 지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가졌다. 입덧이 심해 깜깜한 새벽에 깨서 한바탕 노란 물(위액)을 게워내고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다 입덧이 심했다는 엄마 생각이 났다. ‘우리 엄마는 내가 철들기도 전에 돌아가셔서 나한테 효도도 제대로 못 받아보셨지. 아직 50대였던 엄마가, 겨우 20대였던 나를 두고 벼락 맞듯 가는 마음은 어땠을까. 엄마, 엄마가 내 아이로 태어나면 내가 잘해줄게요. 살아 있을 때 받기만 하고 못 해준 거, 내가 다 해줄게요.’ 만삭의 배를 쓰다듬으면 아기는 태동을 했다.
영혼을 건드리는 음색의 가수 시아 덕분에, 이렇게 좋은 멜로디를 온전히 사람의 힘만으로 만들 수 있는 건가 싶은 ‘스노우맨’ 덕분에, 맺혀있는 줄도 몰랐던 매듭이 하나 풀렸다. 생각해 보니 엄마한테 마음을 전하지 못한 나보다, 세상에 남을 딸에게 “아삭아.” 한 마디도 못하고 간 엄마가 더 할 말이 많았겠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야야, 니 내보다 할 말이 많나. 택도 없다. 시집도 안 간 딸내미 두고 가는 엄마 심정을 니가 아나? 남자는 너거 아빠처럼 20보 앞에 저만치 먼저 걸어가는 남자 말고, 다정시레 같이 가는 사람 만나야 한대이, 찌개 끓이가 마싰게 묵고 남았으모 냄비 한 바퀴 뺑 돌아가믄서 삭 닦아 놓고, 알제? 어데 가서 뭐 하등지 간에 남한테 폐끼치머 몬 쓰는기라. 내 하고 싶은 말 다 할라모 몇 날 며칠 밤새도 다 몬한대이. 니 감당할 수 있겠나?”
이제 눈물 없이 ‘스노우맨’을 따라 부를 수 있다.
<후기>
글쓰기가 심리치유 효과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스노우맨 노래를 좋아해서 글을 시작했을 뿐인데, 글을 어떻게 쓸까 고민한 것뿐인데, 노래를 듣다 울다 내 속에 묵은 매듭을 풀게 됐습니다.
마법에 걸려 낮에는 백조로 변한 열한 명의 왕자가 여동생이 쐐기풀로 만든 옷을 입자 마법이 풀려 다시 왕자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백조 왕자’ 동화가 있지요. 오빠들의 옷을 만드느라 피가 나고 물집이 터져 엉망이 된 손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공주는 마녀로 몰려 화형장으로 끌려가는 수레에서도 옷 만들기를 포기하지 않고 다급한 심정으로 손을 놀립니다. 마침내 불길 앞에서 “오빠들!”을 외치며 쐐기풀 옷을 하나씩 공중에 높이 던지고, 정지한 듯 허공에 펄럭이는 옷에 백조의 몸을 꿰어 왕자의 모습으로 땅에 발을 딛는 오빠들.
피가 나고 물집이 터지는 글쓰기를 불길 앞에서도 멈추지 않고 계속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저기 어딘가에 묻혀있는 상처, 매듭이 아물고 풀려 나를 마법에서 풀고 자유롭게 할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