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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이령 Nov 12. 2024

단단한 벽과 작은 균열

클레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서평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임신하고 물에 뛰어들어 죽은 여자를 암시하고자 했고 가능하다면 그런 뉘앙스가 번역문에도 유지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소설가 존 맥가헌은 좋은 글은 전부 암시이고 나쁜 글은 전부 진술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 책을 처음 읽는 독자가 물에 빠져 죽은 시신의 암시를 의식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지만, 저는 좋은 이야기의 기준 가운데 하나는 독자가 이야기를 다 읽고 첫 문장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도입 부분이 전체 서사의 일부로 느껴지고 이 부분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그 뒤에 이어질 내용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옮긴이의 글’의 앞부분이었다. 책을 처음 봤을 때 첫 문장이  집중되지 않았는데, 끝까지 읽고 다시 보니 암시로 가득 찬 문장이었다. 이 책이 두 번, 세 번 읽으면 더 좋은 책이란 것을 모두가 인정한다. 그런데 팟캐스트에서 누군가가 ‘두 번 읽어야 좋은 책이 진짜 좋은 책인가’라고 질문을 던졌을 때, 나는 좋은 책과 좋은 글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됐다. 나는 잘 읽히는 글을 쓰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좋은 책이라고 평가받은 책들을 보면 무심결에 읽었는데 마음을 사로잡는 글이 있는가 하면 읽기 힘든 글도 있다. 읽기 어렵지만 좋은 글도 분명히 존재한다. 내가 쓰고 싶은 좋은 글은 뭘까?


일단 내 글이 기술적으로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글을 쓰는 것을 배우고 있지만, 아직은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 하지만 나의 글이 틀에 갇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누군가를 따라 하지 않고 쓴, 형식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장점이 분명 있을 테니까. 가끔 머릿속에 있는 것을 글로 꺼내 놓고 싶어서 참을 수 없을 때가 있다. 나는 그런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어쩔 수 없이 쓰는 글이 아닌, 책을 내놓기 위한 글이 아닌, 정말 쓰고 싶어서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쓴 글들, 세상에 내놓고 싶어서 쓰는 말들이 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44p)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119p)


클레이 키건은 <맡겨진 소녀> 이후로 10년 만에 100페이지 남짓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책날개를 살펴보면 작가는 24년 활동하면서 단 4권의 책만 냈는데, 그 모든 작품들이 얇고 예리하고 우수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클레이 키건은 아주 짧은 분량 안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추려서 묶어 낸 듯한 느낌을 준다. 클레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은 종교와 삶의 의미를 담고 있는 책이다. 작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욘포세의 소설과 비슷한 것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아주 많이 달랐다. 욘포세의 글은 신선했지만 낯선 반복에 읽기가 힘들었다.


멜랑콜리커는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고민하며, 사후세계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다는 딜레마’를 안고 있는 사람이다.……멜랑콜리커는 과거를 부정하지 않고 불안을 받아들인다. 삶을 버팀으로써, 현재 안에 존재하는 과거와 예견된 죽음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만나는 순간 멜랑콜리는 빛을 발한다. 포스트모던 혹은 포스트 포스트모던 시대에 불시착한 요한네스와 같은 멜랑콜리커들은 서늘한 외로움을 감당하며 묻고 또 물을 것이다. 거대한 시공간 앞에 선 존재의 불안과 허무에 대해. 좋은가, 그곳은? (욘포세, <아침 그리고 저녁> 옮긴이의 말 중에서)


좋은 글은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했는가, 그리고 그것이 독자에게 어떻게 와닿았는가가 중요하다. <아침 그리고 저녁>에서의 리듬감 있는 반복이 존재의 불안을 표현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는 작가가 심어놓은 암시가 독자를 펄롱과 함께 고민하게 만든다. 읽기 쉬운 글만 좋은 글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두 작가가 글을 통해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고민하며 ‘실존’할 것을 권했을 때, 그것이 나에게 와닿았다.



얼마 전 chatGTP와 실존에 대해 논하는 글을 읽었는데 아주 인상 깊었다.

Q: 어떻게 단순히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나요?
chatGTP: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살아있는 것 이상, 진정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목적, 가치, 그리고 관계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이는 사색, 의미 있는 관계를 추구하는 것, 생존을 넘어 개인적 성장을 추구하는 것, 다른 사람들과 사회에 기여하는 것 등을 포함합니다.

Q: 실존적 위기가 무엇인가요?
chatGTP: 실존적 위기란 개인이 인생의 의미, 목적, 가치에 대해 깊이 의문하고 불확실해지는 심리적 상태를 말합니다. 종종 심각한 방황감, 불안감, 그리고 존재적 고통을 동반합니다.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실존)은 괴로움을 동반한다는 이 질문과 답이 나에게 의미 있는 이유는 나는 항상 삶이 괴로울 때 책을 읽거나 글을 썼기 때문이다.



한편 니체의 철학을 담은 책 <사는 게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에서 인생의 의미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했다.


아이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말은 곧 인생을 유희처럼 사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어떤 재미있는 놀이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왜 이 놀이를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놀이가 재미있어서 놀 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순간에 ‘왜 이 놀이를 해야 하지?’라며 놀이의 의미를 묻게 될까요? 그것은 바로 놀이의 재미가 사라졌는데도 계속해서 그 놀이를 해야 할 때입니다. …… ‘인생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그런 물음이 제기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삶을 재미있는 유희처럼 살아갈 때에만 해소될 수 있습니다. (<사는 게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 중에서)


나는 가끔 내가 왜 살아나가야 하는지 궁금할 때가 있는데, 하필이면 제법 괴로울 때 위의 책을 읽었다. 인생을 유희처럼 살지 못하는 내가 패배자처럼 느껴졌다. 그런 비관적인 것을 마음 한 켠에 두고 있던 나에게 클레이 키건과 욘포세, ChatGTP는 삶의 의미를 추구하며 사는 것은 원래 괴로운 것이라고, 그것이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이라고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클레이 키건이 말하는 ‘실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펄롱은 생각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대로 마찬가지일까 - 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29p)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쳐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120p)
좋은 사람들이 있지, 펄롱은 차를 몰고 시내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주고받는 것을 적절하게 맞추어 균형 잡을 줄 알아야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사람들하고 잘 지낼 수 있단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특권임을 알았고 왜 어떤 집에서 받은 사탕 따위 선물을 다른 더 가난한 집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2-103p)


주인공 펄롱은 자신이 받은 선의와 그것을 행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한다. 그가 길을 잃었을 때 노인이 나타나서 말한다.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결국 세상은 놀라울 만큼 사소한 것들로 돌아간다. 나비의 날갯짓에서 시작하는 태풍처럼. 지금 가는 길의 방향을 1도만 틀어도 걷다 보면 전혀 다른 길이 나올 테지만, 방향을 조금 튼다는 것은 상태를 보수적으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본능인 인간에게는 괴로운 일이다. 옳은 방향으로 밀어주는 힘은 누군가가 나에게 준 작은 선의이다. 누군가가 선뜻 내민 선의가 돌고 돌아서 세상이 돌아간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세상이 개인의 선으로만 돌아가면 안 된다. 그러기엔 인간은 나약한 부분도 가지고 있다. 일부 독자는 마무리를 끝까지 짓지 않은 이 책에 대해 비판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펄롱의 괴로운 미래를 상상하게 된다. 갑자기 나타난 여자아이를 가족들은 받아들여 줄 것이냐, 펄롱의 원래 딸들은 수녀원의 학교를 다녀야 하는데 무사할 것이냐 등의 옳은 일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생각해 보게 된다. 책 속의 등장인물도 이렇게 말한다.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그들은) 다 한통속이다.” 이러한 자기합리화는 우리를 옳은 길로 나아가지 못하게 방해한다.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구두 상자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121p)


실존의 괴로움에도 펄롱이, 그리고 이 책이 세상의 단단한 벽에 작은 균열을 만들어 냈다고 확신한다. 그런 작은 균열이 모여서 언젠가는 단단한 벽이 무너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클레이 키건은 펄롱을 통해 내 마음에 작은 돌을 던졌다.



다시 내가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생각해 본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글이면 충분하다. 기술이나 형식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쓸 뿐이지, 글의 알맹이가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그러면 나는 세상에 어떤 내용의 글을 꺼내놓고 싶은 걸까?


이 책을 읽고 독서모임에 갔다 와서 스스로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나름대로 세상의 불의에 맞서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나는 항상 내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내 안위 밖을 벗어나는 불의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살았다. 다른 사람을 돕고 선의를 베푼다는 것이 무서웠다. 독서모임의 멤버가 자신이 잘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관에 알리고 신고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얼마 전에 직장에서 후배가 일을 그만두면서 나에게 편지를 줬다. 자신은 일하면서 무력하다고 느낄 때가 많았는데, 정의롭게 행동하는 나를 보면 멋있었고 힘이 됐었다는 내용이었다. 그걸 읽고 좀 우쭐하던 때였던 것 같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나는 나의 바운더리에 갇혀있었다. 펄롱의 행동을 지지하지만, 나도 막상 그 상황이 되면 펄롱처럼 행동하지 못했을 것 같다. 나는 아마 펄롱처럼 세상에 작은 균열을 일으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도 세상에 균열을 일으키고 싶다. 단단한 벽에 맞서고 싶다. 절대 바뀌지 않 것들을 바꾸고 싶다. 내가 소설을 쓰고 싶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내 이야기만 하는 것은 세상 밖으로 뻗어나가기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내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었다. 소설은 내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이야기인척 쓰는 것뿐이니까. 지금은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작은 돌멩이들이 조금 더 멀리 던져지기를 바랄 뿐이다.


세상 밖으로 돌멩이를 던져봐도 결국 세상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것은 결국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다. 나의 마음을 견고하게 깎아서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돌을 던진다. 그것은 사랑과 공감과 연대가 될 것이다. 마음에 돌을 쌓은 사람들이 모이면 같이 벽을 부수고 새로 지어 올려서 세상이 바뀌지 않을까?  

 

                


**참고자료:

<챗 GTP와 실존을 논하다> 본문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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